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한상넷
로그인
회원가입
전체검색영역
검색어입력
한상소식
한상소식
공지사항
입찰/행사/채용
비즈니스 정보
비즈니스 정보
한상기업 정보
글로벌 파트너십
한상비즈니스자문단
한상기업 제휴
유통채널 안내
제품홍보
1:1 비즈니스 매칭
국내·외 경제정보
산업∙경제 이슈
부처별 경제정보
Biz News Korea(Eng)
국내청년의 동포기업 인턴십
국내청년의 동포기업 인턴십
인턴십 소개
인턴십이란
지원절차 안내
인턴십 FAQ
인턴십 지원
인턴십 수기
안전 공지사항
세계한인 비즈니스대회 (세계한상대회)
세계한인 비즈니스대회 (세계한상대회)
대회 소개
대회개요
대회 FAQ
등록 안내
기업전시회 등록 안내
리뷰한상
결과보고
사진자료
영상자료
세계한상대회 20년사
정보센터
정보센터
이벤트/설문
이벤트
당첨자 발표
뉴스레터
묻고 답하기
검색
메뉴
로그인
회원가입
한상소식
공지사항
입찰/행사/채용
비즈니스 정보
한상기업 정보
글로벌 파트너십
한상비즈니스자문단
한상기업 제휴
유통채널 안내
제품홍보
1:1 비즈니스 매칭
국내·외 경제정보
산업∙경제 이슈
부처별 경제정보
Biz News Korea(Eng)
국내청년의 동포기업 인턴십
인턴십 소개
인턴십이란
지원절차 안내
인턴십 FAQ
인턴십 지원
인턴십 수기
안전 공지사항
세계한인 비즈니스대회 (세계한상대회)
대회 소개
대회개요
대회 FAQ
등록 안내
기업전시회 등록 안내
리뷰한상
결과보고
사진자료
영상자료
세계한상대회 20년사
정보센터
이벤트/설문
이벤트
당첨자 발표
뉴스레터
묻고 답하기
한상소식
공지사항
입찰/행사/채용
한상소식
세계한상소식
한상뉴스
한상소식
공지사항
입찰/행사/채용
한상뉴스
국내를 포함한 세계 지역경제 소식, 한상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본 메뉴는 외부사이트의 뉴스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시는 뉴스의 의미 전달에 제약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체
(61061)
국내
(60048)
아시아/대양주
(273)
북아메리카
(617)
남아메리카
(26)
유럽
(74)
중동/아프리카
(20)
독립국가연합
(3)
게시글 검색
검색기간
~
종료조회기간
(예시:19990101)
보기조건 갯수 선택
10개 보기
20개 보기
30개 보기
6084/6107
페이지
(전체 61061)
검색분류선택
제목
내용
검색어를 입력해주세요
[국내]
한국계 加투자기업, 광양만에 1천500만달러 투자
연합뉴스 | 2011 05 10 09:58 (밴쿠버=연합뉴스) 조재용 통신원 = 캐나다의 한국계 투자기업 SMG사(대표 문정)는 9일 밴쿠버에서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GFEZ)청과 해외자본 투자 및 지원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이 지역에 1천500만 달러를 투자해 생산기지를 설립키로 했다. 이날 밴쿠버 메리어트 호텔에서 코트라 밴쿠버 비즈니스센터(센터장 양국보) 주관으로 열린 투자신고식에서 SMG사는 캐나다 기술을 기반으로 광양만권 율촌 자유무역지역에 산업용 대형 건조기계 제조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SMG사는 본사를 밴쿠버에 두고 있는 금융컨설팅 및 자산운용 전문 업체로 캐나다 내 기업이나 개인 자금을 유치해 환경기술 및 자원개발 관련 프로젝트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다. 이번 투자유치를 통해 율촌 지유무역지역에서 생산될 건조기계는 열량효율이 낮은 갈탄을 건조시켜 일반 석탄 열량수준으로 향상시키는 설비로, 석탄 구입비용이 t당 120달러인 데 비해 갈탄 구입비용과 건조기계 생산 비용을 합한 전체 비용이 t당 80달러에 불과해 수익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코트라는 설명했다. 갈탄은 열효율이 낮아 적용분야가 2차 연료 등으로 한정돼 있으나 건조기계를 통해 열량효율을 향상할 경우 연간 8천만t의 석탄 수입 대체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설비류 수출효과도 기대된다고 코트라는 덧붙였다. SMG사는 건조기계 외에도 수질과 토양의 중금속 및 총인 제거, 폐수나 슬러지 중화 및 에너지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으며 연내 한국의 관련 분야에 500만달러를 추가 투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코트라는 건조기계 제조공장 부지를 물색하는 SMG사에 국내 경제자유구역과 지방자치단체의 투자 인센티브에 대한 정보를 제공, 이 회사의 최종 투자결정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jaeycho@yna.co.kr (끝)
2011.05.11
[국내]
日 소프트뱅크, 아이폰 앞세워 순이익 두 배 늘려
연합뉴스 | 2011 05 10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재일동포 기업인 손정의(일본명 손마사요시)씨가 이끄는 일본 통신회사 소프트뱅크가 아이폰을 앞세워 연간 순이익을 두 배로 늘렸다고 일본 언론이 9일 보도했다. 소프트뱅크가 이날 발표한 2010 회계연도(2010년 4월∼2011년 3월) 연결결산에 따르면 매출은 2009년도보다 8.7% 늘어난 3조46억엔으로 창업 이래 처음으로 3조엔(약 40조원)을 넘었다. 영업이익은 35% 늘어난 6천291억엔, 순이익은 96.2% 증가한 1천897억엔(2조5천억원)이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휴대전화 기지국 등 일부 설비가 피해를 본 탓에 특별손실이 144억엔에 이르렀지만, 성장세를 꺾지는 못했다. 소프트뱅크가 일본에서 독점 판매하는 아이폰 등 휴대전화 판매대수가 전년도보다 110만8천대 증가한 1천24만2천대에 이르렀고, 자회사인 야후재팬의 검색연동형 광고가 호조를 보인 덕으로 풀이됐다. 손 사장은 9일 연결결산 발표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2년간 휴대전화 기지국을 늘리는 등 설비 투자에 1조엔 정도를 쏟아붓겠다"고 밝혔다. 매출 1, 2위 통신회사인 NTT 도코모와 KDDI는 수입이 줄었다. NTT 도코모의 매출은 전년도보다 1.4% 감소한 4조2천242억엔, KDDI의 매출은 0.2% 줄어든 3조4천345억엔이었다. 소프트뱅크의 연결영업이익은 2009년도에 이미 KDDI를 웃돌았다. chungwon@yna.co.kr (끝)
2011.05.11
[국내]
푸드 트럭으로 길거리 한식 홍보!
2011.05.06
[국내]
케냐 장재영씨
`환성케냐' 경영하는 장재영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가구회사 `환성케냐'를 영하는 장재영(52)씨는 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실패를 두려워하 지 않는 용기만 있다면 검은 대륙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연매출 67억원을 올리고 있는 환성케냐 가구공장 앞. 2011.5.3 noanoa@yna.co.kr 은행원서 케냐 가구공장 사장으로 변신 동아프리카 가구업계 1위 찍고 호텔사업 진출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가구회사 환성케냐를 경영하는 장재영(52)씨는 에너지가 넘친다. 케냐에 발을 디딘지 7년만에 직원 120명을 거느리고 연간 70여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동아프리카 최대의 가구공장으로 키워냈다는 자부심이 장씨의 목소리 톤을 절로 높이는 듯 했다. 장씨는 3일 연합뉴스와 가진 전화인터뷰에서 "아프리카에는 어디든 다국적 기업이 들어와 있어 치열하게 경쟁하는 재미가 있다"면서 "한국인은 머리가 좋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빨리' 진행할 수 있어 어느 나라 사람과 경쟁해도 승산이 있다"고 자신감을 표출했다. 그는 "환성케냐는 은행 부채가 단 1원도 없다"면서 "지금은 미화 1천500만달러가 투입되는 5성급 호텔 사업에 새로 도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씨의 아프리카 진출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부산대 상과대를 졸업한 뒤 HSBC 은행에 이어 싱가포르 등지를 오가며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장씨는 2001년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우간다 환성그룹의 성공 스토리를 접했다. 환성그룹은 김성환 회장이 1991년 우간다에 세운 민물 농어 가공공장에서 출발한 기업으로, 빅토리아호에서 잡은 농어를 포 떠 냉동한 뒤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등지에 수출해 큰 돈을 벌어 스티로폼과 샌드위치 패널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가는 단계였다. 장씨는 때마침 신문에 환성그룹 채용 공고가 나자 망설임없이 지원서를 냈다. 장씨는 서울에서 진행된 면접에서 김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시 "우간다에서 웬만큼 돈은 벌었는데 새로운 사업을 함께 할 인재가 없다"는 김 회장의 말에 "제가 바로 적임자"라며 `건방'을 떨었다고 한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일주일 만에 우간다로 날아간 그는 김 회장을 도와 가구공장, 알루미늄 공장, 목공공장을 세웠으며 3년 만에 각각 우간다의 업계 1위로 키워냈다. 장씨는 "가능성을 보고 환성을 선택했는데 탁월한 결정이었다"며 "어떤 일을 하다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는 도전의식이 남들보다 좀 강한 것 같다"고 스스로 인물평을 했다. 케냐 5성급 호텔 건설 현장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가구회사 환성케냐를 경영하는 장재영(52)씨는 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실패를 두려 워하지 않는 용기만 있다면 검은 대륙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케냐에서 제2의 도약을 위해 미화 1천500만 달러를 투입해 5성급 호텔을 짓고 있는 현장. 2011.5.3 noanoa@yna.co.kr 부장으로 처음 채용됐던 장씨는 두 달 만에 이사가 됐고, 1년 반 만에 전무 직함을 달았으며 다시 1년 만에 사장으로 올라섰다. 우간다 시장이 좁다고 판단한 장씨는 동아프리카의 허브인 케냐로 진출, 2004년 7월 수도 나이로비에 가구공장을 짓고 `환성케냐'의 현지 총괄책임을 맡았다. 장씨는 "처음 케냐에 갈 때 본사로부터 자금만 받고 모든 일을 위임받았다"면서 "도착하자마자 땅을 사고, 공장을 짓고, 직원을 채용하는 등 정신없이 달렸다"고 회고했다. 2007년 12월에는 케냐 대통령선거 개표 부정 의혹으로 3천여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비교적 순조롭게 사업을 키워나갔다. 장씨는 "후진국의 좋지않은 특성 중에 거짓말하고, 약속 안 지키는 점이 있는데 케냐도 마찬가지"라며 "이 특성을 역으로 이용하면 오히려 성공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고객이 아무리 엉뚱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이를 `광고이자 투자이거니…'라고 생각하고 들어줬다는 것. 이러한 사업 철학을 견지하자 어느 순간부터 케냐 부유층 사이에 "품질은 물론 서비스까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가구가 불티난 듯 팔려 나갔다. 장씨는 "현재 케냐의 모든 타운하우스와 대형 아파트에는 환성케냐의 부엌가구와 붙박이장이 납품된다"고 자랑했다. 아프리카에 발을 들여놓은 지 이제 10년. 장씨는 제2의 도약을 위해 호텔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케냐의 제1사업은 관광산업이라는 점에 착안해 1년 정도 준비한 끝에 객실 167개의 5성급 호텔공사를 지난달 시작했다"며 "2년 뒤에 이 호텔이 완성되면 2호, 3호 호텔을 지어 앞으로 10년간은 이 분야에 승부를 걸어 볼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현재 장씨는 부인, 두 딸과 함께 대지 3천㎡(900평) 규모의 저택에 고용인 다섯 명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케냐는 선진국에 비해 돈의 효용가치가 아주 높다"며 "현지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이곳에 사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요즈음 한국에서는 청년실업이 심각하다고 하던데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기회가 있다"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만 있다면 검은 대륙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noanoa@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5.03
[국내]
재외동포재단, 한상 리딩 CEO 포럼 개최
▲재외동포재단은 27일(현지시간) 캐나다 밴쿠버의 버나비 힐튼호텔에서 제19차 세계한상대회 리딩 CEO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에는 한인 최초로 캐나다 연방상원에 진출한 연아 마틴 의원을 비롯해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정부 폴 어윈 차관 등이 참석했다. 세계한상대회 리딩 CEO 포럼 장면. (서울=연합뉴스)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4.29
[국내]
[프런티어 한국인] ②스리랑카 엄경호씨
②스리랑카 엄경호씨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스리랑카에서 26년째 거주한 한인사회 `터줏대감' 엄경호(59)씨는 28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박의 꿈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쓴소리부터 내뱉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진은 엄씨가 아내와 함께 1991년부터 운영하는 한국 음식점 `한국관'이다. 2011.4.28 noanoa@yn.co.kr 실 공장 운영 `한인 터줏대감'..26년 거주 "현지화하는 것이 성공 지름길"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스리랑카에서는 600원이면 한 끼 밥을 먹고 7만원이면 가정부를 쓰지요. 이런 나라에서 돈 벌려면 큰 욕심 부리지 말고 개미같이 일해야 합니다" 스리랑카 한인사회의 `터줏대감' 엄경호(59)씨는 28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박의 꿈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쓴소리부터 내뱉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국립식물검역소에서 근무하던 엄씨는 1985년 말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소속으로 처음 스리랑카 땅을 밟고는 이듬해 사표를 던지고 아내와 세 딸을 불러들였다. 당시 큰딸이 7살, 막내가 생후 6개월인 상태에서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접고 교민이 100명도 채 안 되는 섬나라에서 직접 농사를 짓겠다고 모험을 자초한 것. 엄씨는 "스리랑카에 와 보니 남는 게 땅이고, 사람이라서 농사 욕심이 나더라"며 "제2의 도시인 캔디 밀림에 땅 6만6천㎡(2만평)를 빌리고 현지인 20명을 고용해 채소를 길렀는데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고생도 했지만 보람도 컸다"고 말했다. 1989년 내전이 심해지면서 전기, 수도가 모두 끊기자 간단한 살림살이만 챙겨 수도 콜롬보로 피신, 한 달간 호텔에 머물면서 귀국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는 "내전 때문에 사업이 거덜나고 나니까 너무 비참했다"며 "나름 공직에 있었고 유엔에서도 일했는데 망하고 나니 대우해 주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고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벼랑 끝에 선 엄씨는 `나를 믿고 여기까지 온 가족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재기를 모색했고, 때마침 헐값에 나온 식당이 있어 1991년 9월 `한국관'이라는 한식당을 열었다. 엄씨는 "신기하게도 식당을 열자마자 한국 기업들이 줄줄이 스리랑카에 진출하면서 손님이 물밀듯이 몰려와 매일 테이블(145석)이 꽉 찼다"며 "얼마 안 지나 재산도 모으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0년째 같은 자리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면서 2003년에는 `한성 코알라'라는 실 염색 공장을 차렸다. 스리랑카가 60∼70년대의 한국처럼 봉제산업이 발달한 곳임에 착안, 한국이나 중국에서 원사를 수입해 수백가지 색으로 염색한 뒤 현지 의류업체에 납품했다. 현재 거래 업체가 80여개로 늘어 연간 매출이 15억원에 달한다. 엄씨는 "한국인 직원 한 명을 두려면 월 4천달러는 줘야 할 텐데 그 돈으로 스리랑카 직원 35명을 고용했다"며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면 최대한 빨리 현지화하는 것이 성공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물론 자식 농사에서도 성과를 거뒀다. 세 딸을 모두 서울의 일류대학에 진학시켜 교직원, 의사, 대기업 사원으로 길러낸 것이다. 엄씨는 "우리 애들이 선진국도 아닌 스리랑카에 와서 말도 안 통하는데 고생을 많이 했다"며 "그래도 여기는 유흥문화가 없어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스리랑카 한인회와 경제인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민주평통 서남아협의회 스리랑카 분회장을 맡고 있으며 처음 스리랑카에 온 기업인이나 자원봉사 단원 등에게 `26년차 최고 선임자'로서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엄씨는 "한국에서 사업하러 온 사람들을 보면 돈 쓸 줄을 모른다"며 "왕복 항공권을 끊고 1천달러를 가져왔다면 900달러는 현지에서 써봐야 제대로 된 돈의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낚시할 때 밑밥을 적당히 뿌려야 잔챙이들이 몰려오고 그 틈에 큰 고기가 잡히는 법인데 한국인들은 외국에 사업하러 나와서 자잘한 것만 챙기려다 큰 기회를 놓친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한국인들은 반응이 너무 빠르다"며 "스리랑카가 한국의 60∼70년대 수준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무조건 현지인들의 말을 경청하되 절대 그 자리에서 답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영주권 제도가 없어서 매년 사업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엄씨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해야할 일이 아직 남았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이 사업하러 오면 투자 방향과 절차를 도와주고, 회계부문이라 법률자문까지 전문적으로 하는 컨설팅 회사를 차릴 계획"이라며 "한국에서 치열하게 살던 대로만 스리랑카에서 살면 뭘 해도 잘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noanoa@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4.29
[국내]
[프런티어 한국인] ①적도기니 백기선씨
①적도기니 백기선씨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백기선(50)씨는 인구 100만의 아프리카 소국 적도기니에서 우물 사업에 성공하며 그간의 고생과 설움을 모두 털어냈다. 관정업체 뿌엔떼 데 라 비다사를 운영하며 현지인들 사이에서 `미스터 백'으로 통하는 백씨는 26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경쟁자가 없는 아프리카는 기회의 땅"이라며 "아프리카에 간 것은 운명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2011.4.26 noanoa@yna.co.kr 우물파기 사업으로 연매출 15억원 달성 "맨발로 뛸 각오 있으면 아프리카 오라" ※편집자주 =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700만 재외동포 중에는 남다른 노력과 독특한 사업 아이템으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이들이 적지 않다. 치열한 도전정신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됐음은 물론이다. 연합뉴스는 해외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새로운 삶을 개척함으로써 한국인의 저력을 떨친 재외동포들의 성공 스토리를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10여 회에 걸쳐 송고한다.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검은 대륙에 돈이 있어요. 대신 맨발로 뛰겠다는 각오를 지닌 사람만 와야 합니다" 가난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백기선(50)씨는 인구 100만의 아프리카 소국 적도기니에서 우물 사업에 성공하며 그간의 고생과 설움을 모두 털어냈다. 관정업체 뿌엔떼 데 라 비다사를 운영하며 현지인들 사이에서 `미스터 백'으로 통하는 백씨는 26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경쟁자가 없는 아프리카는 기회의 땅"이라며 "아프리카에 간 것은 운명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전남 강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백씨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온갖 고생 끝에 모은 돈으로 화물차를 장만, 운수업에 나섰으나 1994년 대형 교통사고를 내면서 시련에 봉착했다. 이후 중고차 매매와 옥매트 공장, 다시 화물차 운전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던 백씨는 2004년 4월 연봉 5천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가족을 부산에 남겨두고 혼자 적도기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독일과 스페인에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수도 말라보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건 우리나라 시골 버스정류장보다도 못 했다"며 "덥기는 또 어찌나 더운지…숨이 턱턱 막혀왔다"고 7년 전을 떠올렸다. 백씨는 카지노 건설을 추진하던 한국인 사장을 도와 1년간 일했지만 사업이 망하면서 골재상을 하던 다른 한국인 사장 밑으로 일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9개월을 고생하고서도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차마 빈손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노무자들과 함께 월세 15만원짜리 집에 살면서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한국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인터넷신문고에 올려 우리 정부가 임금을 체불한 한국인 사장에게 조속한 조치를 명령하기도 했었다.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하루하루 버티던 그는 현지 중고차 수입상 다마소 오사오사(42)씨를 만나면서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고물 자동차를 척척 고쳐내는 그의 손기술과 성실함에 반한 오사오사씨가 사업자금을 대겠다고 제안한 것. 두 사람은 2006년 10월 한국에 함께 와 5천여만원을 주고 중고 지하수 시추기 한 대와 `함마'(굴착용 쇠기둥) 두 개를 컨테이너에 실었다. 한 달 반 만에 적도기니로 돌아온 백씨의 수중에는 미화 200달러가 전부였다. 그는 2007년 2월 말라보의 밀림에서 처음 시추기를 작동했지만 지하 85m지점에서 지반이 붕괴되며 함마 두 개 중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하나의 함마로 조심조심 첫 우물을 파는 데 성공한 백씨는 그 해 무려 43개의 우물을 파서 10억원을 벌었다. 적도기니는 수도시설은 있지만 정수하지 않은 물을 공급하는지라 부유층이나 외국인들은 개별적으로 우물을 파서 식수로 쓴다. 사업 초기에는 프랑스인 몇 명이 관정 사업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보름에 걸쳐 우물을 파주는 대가로 1천500만 세파프랑(3천400만원)을 받은 반면 백씨는 하루 만에 우물을 파고 900만∼1천300만 세파프랑(2천만∼3천만원)을 받았다. 특히 `먹는 물은 안전해야 한다'며 녹슬지 않는 한국산 스테인리스 파이프와 이탈리아산 펌프만 쓰는 백씨의 사업 원칙이 소문을 타면서 매일 여행가방에 지폐 다발을 채워넣을 만큼 돈이 쌓였다. 지난 4년간 200개의 우물을 파며 연 매출을 15억원대로 끌어올린 백씨는 목돈이 모일 때마다 새로운 기계와 화물차를 사들여 현재 50여대의 장비를 보유한 적도기니의 최대 관정업체로 회사를 키웠다. 또 현재 적도기니 보건당국과 서민을 위한 우물 400개를 파는 사업을 협상 중이며 건설경기 붐을 겨냥해 29m 대형 굴착기를 수입하는 등 지반공사까지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다. 백씨는 연간 매출을 30억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지금도 새벽 6시에 기상한 뒤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우물을 파고 늦은 밤 귀가하는 고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적도기니와 가나, 카메룬 출신 흑인 12명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나와 반년만 일하면 게으른 습성이 사라진다"며 "사장이 솔선수범해서 일하고 기술이 향상된 직원에게 석 달마다 월급을 15%씩 올려주는 게 비법"이라고 설명했다. 백씨는 `그만하면 성공했다'는 주변의 칭찬에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는 "이제 시작일 뿐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며 "언젠가 아프리카를 떠나겠지만 `한국인 백기선'이라는 이름 석 자를 검은 대륙에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뛰겠다"고 말했다. noanoa@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4.29
[국내]
캐나다 영리무역 회장 이영현씨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으로 1조원 매출 (밴쿠버=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가전제품은 모두 내 손안에 있다' 캐나다에서 영리무역이라는 유통업체를 경영하는 이영현(70) 회장은 한국 가전제품을 수입.판매해 연간 1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1966년 토론토로 아이스하키 유학을 왔다가 정착한 뒤 단돈 200달러를 사업 밑천으로 `거상'의 반열에 오른 것. 재외동포재단 주최로 밴쿠버에서 개최 중인 제18차 세계한상대회 운영위원회 회의에 참가한 이 회장은 26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오로지 한국 상품만을 사다가 캐나다에 팔았다"며 "월마트, 씨어스, 베스트바이, 후처숍, 캐네디언 타이어 등에서 팔리는 한국 상품 중 가전제품은 모두 내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한국 상품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기 이전에는 손해를 엄청 많이 봤지만 지금은 세계를 대표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가 많아서 갈수록 부자가 되고 있다"며 "비록 조국을 떠나 살지만 한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 시장에 내다 팔 한국 상품이 많다는 것은 곧 후진들이 할 일이 많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등 재외동포 경제단체들이 세계 각국에서 진행하는 차세대 무역스쿨에 빠짐없이 강사로 참여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고 한다. 국내 대학생들에게도 세일즈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양대, 성균관대, 가톨릭대, 전남대, 동서대, 창원대를 찾아가 '한국상품은 나의 자존심이다'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지금까지 41개 대학을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또 한상대회는 물론 월드옥타가 주최하는 행사에도 단 한번도 결석하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이 회장은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서 회비와 항공료, 숙박비 등으로 쓴 돈이 150만달러를 훨씬 넘을 것"이라며 "경비가 많이 들지만 조국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민다"고 했다. 월드옥타 12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각종 행사 때마다 `잔소리'를 아끼지 않아 동포 경제인들 사이에서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삼성 제품만을 취급해 '삼성맨'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그는 "세계 시장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제품이기 때문에 삼성만을 고집한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대한민국 경제는 날이 갈수록 눈부신 발전을 할 것이고, 획기적인 위치로 올라설 것으로 믿는다"며 "이것은 나의 희망이자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목표"라고 말했다. 영리무역 이영현 회장. ghwang@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4.28
[국내]
[한인 무역인이 뛴다] ⑧캐나다 유동하씨(끝)
캐나다 이민 13년만에 헬리콥터 중개상으로 `우뚝' (창원=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캐나다 밴쿠버에서 헬리콥터 판매 중개회사인 세림교역을 운영하는 유동하(58)씨. 그는 13년 전 자녀 교육을 위해 안정적인 샐러리맨 생활을 접고 무작정 이민길에 올랐다. 그리곤 직장 경험을 토대로 헬리콥터 중개 사업에 뛰어들어 보란 듯이 새로운 삶에 안착했다. 21일 경남 창원시에서 열린 월드옥타 제13차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에서 기자와 만난 유씨는 "일단 캐나다에 가서 몸으로 부딪히면서 살자고 가족을 설득해 태평양을 건넜다"고 말했다. 그는 "밴쿠버에 가면 전공인 무역업을 해 밥은 굶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객기였음을 곧바로 깨달았다"고 했다. 우선 단 1명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현지 동포들은 이곳에서는 무역 아이템이 없으니 포기하는게 좋을 것이라며 유씨의 기를 꺾었다. 실제로 나름대로 시장 조사를 해 본 결과, 대부분의 한인은 소규모 자영업에 종사할 뿐 무역을 하는 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민과 좌절의 나날이 이어지다 2000년 6월 월드옥타 밴쿠버지회에서 무역세미나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유씨는 이 세미나에서 만난 한 월드옥타 회원으로부터 "전세계 헬리콥터 수리의 절반 이상이 밴쿠버에서 이뤄진다"는 얘기를 듣고 활로를 찾았다고 한다. 삼성테크윈에서 항공기 엔진정비와 부품 수출업무를 하며 영업부장까지 오른 경험을 살려 헬리콥터 판매 중개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것. 1년여에 걸친 철저한 조사 끝에 그는 세림교역을 설립했고 마침내 2003년 대당 100만달러가 넘는 헬리콥터 거래를 처음으로 성사시킨 뒤 막대한 중계료를 챙겼다. 이후 10대 이상의 헬리콥터를 판매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밴쿠버 내 외국인 헬리콥터 중개상 중 유일한 한국인인 유씨는 캐나다 헬기업체의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컨설팅도 맡고 있다. 월드옥타 밴쿠버 지회장을 맡고 있는 유씨는 최근 2년 간 150명의 차세대 회원을 배출하는 등 동포 경제인 육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유씨는 해외 진출을 목표로 하는 젊은이들에게 "철저한 조사와 탐구, 완벽한 현지어 구사, 자신의 전공 분야를 찾아서 사업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ghwan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4.27
[국내]
[한인 무역인이 뛴다] ⑦호주 김승씨
역경끝에 호주서 `붙임머리'로 대박 월드옥타 11통상위원장 김승씨 (창원=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월드옥타 11통상위원장(홈쇼핑ㆍ방문판매분야)을 맡은 호주 시드니 동포 김승(67)씨. 김씨는 21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직해야 장수할 수 있다"며 "사업 하면서 온갖 풍파를 겪어보니 정직만큼 훌륭한 무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2011.4.21 noanoa@yna.co.kr (창원=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제 나이 예순일곱이지만 사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처음 시작할 때와 다름없습니다" 경남 창원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옥타 제13차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에 참가 중인 호주 시드니의 동포 사업가 김 승(67)씨는 21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직해야 장수할 수 있다"며 "사업하면서 온갖 풍파를 겪어보니 정직만큼 훌륭한 무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성공이라 부를 수 있지만, 값어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며 "아내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아이들이 존경한다고 말하기에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는 "돈을 많이 번 때도,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한 때도 있었지만 매 순간 온 힘을 다했다"며 "후배 사업가들이 한 번의 실패에 주저앉지 말고 항상 도전하고 꿈꾸는 삶을 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경북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김씨는 여행사에서 일하던 중 한국을 자주 방문하던 일본인 고객의 눈에 띄어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 스피커 진동판 생산업체를 운영하던 일본인 고객은 김씨의 정직함과 성실함에 반해 1980년 한국지사장 자리를 주고 모든 기술을 전수했으며 10년 뒤에는 충남 아산에 세운 공장마저 헐값에 넘겼다. 직접 공장을 운영하게 된 김씨는 삼성, LG 등 대기업에 진동판을 납품하면서 1990년대 초반 연 매출 10억원을 거뜬히 올렸지만 저가경쟁에 휘말려 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려다 사기를 당했다. 그는 공장에서 썩어가는 기계라도 팔아 보고자 1997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에 갔지만 3년 동안 별 성과도 없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것은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한국인들의 다이아몬드 거래를 돕다 현지 경찰에 붙잡혀 한 달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사이 아내와 아이들은 호주 시드니로 이민했고, 김씨 또한 빈손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가족과 합류했다. 김씨는 "그리운 단계를 넘어서면 가슴이 아린다"며 "3년 동안 가슴 아리게 보고 싶던 가족이 친척집 차고에 사는 모습을 보고 무엇이든 할 일을 찾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포기를 모르는 그는 2002년부터 중국에서 가발의 일종인 `붙임머리'를 사다가 호주인들에게 팔았는데 다행히 대박을 터뜨려 연 매출 400만달러를 달성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종종 동물 털이 섞인 불량품을 수출하고 납기를 제대로 안 맞춰 손해가 커지자 2008년 한국산 건강식품과 화장품을 호주에 공급하는 사업으로 전환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김씨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니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움켜쥐지 말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noanoa@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4.27
첫페이지
이전페이지
6079
6080
6081
6082
6083
6084
6085
6086
6087
6088
다음페이지
마지막페이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