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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 한수원 사장 "인력 수출로만 1조원 규모 계약 성사"
조석 한수원 사장 "인력 수출로만 1조원 규모 계약 성사" 한국 원전 사상 첫 운영용역 수출계약…"새 비즈니스 모델 창출" (아부다미 =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상품 수출에만 주력하던 우리나라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됐지요. 제2, 제3의 원전 수출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20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UAE원자력공사(ENEC)와 한국 원전 사상 처음으로 원전 운영 용역 수출 계약을 마무리 지은 조석 한수원 사장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 사장은 이날 현지에서 진행한 언론 인터뷰에서 "1조원정도 되는 금액을 순수하게 우리 인력 수출만으로 벌어들이게 된 것"이라며 "양질의 일자리도 창출했다"고 강조했다. 한수원은 지난 2009년 한전 컨소시엄에 참여해 UAE 원전 4호기 건설 사업을 수주한 뒤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최초의 해외 원전사업으로 내년 5월 1호기를 시작으로 차례로 준공된다. 한수원은 이번 계약에 따라 내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210명의 전문인력을 현지에 파견한다. 본 계약 6억달러(약 6천800억원)에 주택, 교육 등 간접비 지원 3억2천만달러(약 3천600억원) 등 총 9억2천만달러(약 1조400억원) 규모다. 다음은 조석 사장과 일문일답. - 계약 체결 의의는. ▲ 우리나라가 이 정도 규모의 소프트파워 인력을 파견해 비즈니스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상 처음일 것이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다. 지금까지의 비즈니스 모델은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물건이 오가지 않는다. 양질의 일자리도 생긴다. 힘들기는 하지만 보수 조건이 좋은 일자리다. -- UAE가 원전 운영 계약 파트너로 한국을 고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UAE는 인구 900만명 가운데 본토 국적자가 180만~190만명에 불과하다. 이 사람들만으로 발전소 운영 인력을 모두 채울 수가 없다고 한다. 나머지 인원은 다른 나라에서 협조를 얻어야 했는데 기술 능력을 갖추고 UAE가 신뢰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고 본다. UAE는 세계 최고 수준의 운영 인력을 원했다. 우리는 한국 사람만큼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 UAE와 장기간 협력 관계를 구축하게 됐다. ▲ 우리나라는 UAE 원전 4기를 186억달러에 수주했다. 설계 수명만 60년이다. 이번 계약은 2030년까지다. 2030년 이후에도 재계약을 통해 우리 인력을 계속 파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면에서 이번 계약은 60년 협력관계의 토대가 될 것이다. 예전 중동과의 관계는 우리가 도로, 공항 등을 지어주고 바로 끝났다. 하지만 원전은 계속 운영하면서 관계를 맺는 개념이다. 중동과의 관계도 새롭게 펼쳐지는 셈이다. 또 원전 역사에서 외국인이 자국 원전을 운영하게 하는 예는 거의 없을 것이다. --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 우리는 2030년까지 연평균 210여명을 파견할 계획이다. UAE는 2030년까지 자체 인력 비중을 90%까지 늘릴 예정이지만 계획대로 사람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가 더 보낼 수도 있다. 2030년까지 연도별 파견 인원을 합산하면 총 3천여명정도 된다. 계약 규모는 본계약 6억달러에 간접비용 3억2천만달러가 더해져 총 9억2천만달러 정도 될 것이다. 국내 파견 인력이 받는 월급과 수당 등이 6억달러에서 나오며 간접비용은 주택, 교육 비용 등에 사용된다. 월급을 깎으면 양질의 인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주거비 지원 등을 고려하면 1인당 사실상 연 3억원을 받는 셈이다. -- 파견 인력은 어떻게 충원할 계획인가. ▲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750명을 추가로 뽑았다. 지금 훈련 중이거나 이미 현장에 파견됐다. 이들이 모두 UAE로 파견되는 것은 아니다. 한수원의 정원 한도가 늘어난 것이다. 파견 직원은 3년이 지나면 돌아와야 한다. -- UAE 외에 추가 원전 수출 추진 상황은. ▲ 지난 6월 공기업 기능 조정이 이뤄지면서 한수원도 한전과 함께 원전 수출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기능 조정 이전에는 대외 창구를 한전으로 단일화했는데 앞으로는 필요하면 한수원도 그 역할을 한다. 기존에는 한 명만 슈팅하는 체제였다면 앞으로는 투톱 체제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되더라도 패스하고 협력할 것은 다 할 것이다. 한전은 영국과 베트남 쪽 원전 수출을 맡을 것이며 한수원은 현재 체코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전 수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발전소가 노후화됐고 앞으로 화석 연료 발전 비중을 50% 이내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원전과 신재생 에너지로 채워야 한다. 이번 UAE 계약이 마무리된 만큼 사우디아라비아와 체코 쪽에서도 본격적으로 정비해서 적극적으로 해보겠다. -- 해외에 원전을 수출할 때 키 포인트는 기술력인가 가격경쟁력인가. ▲ 우리는 기술력을 강조한다. 우리의 장점인 온 타임-온 버짓(공사기간과 금액을 예정대로 지켜낸다는 뜻)이 다른 데에 가도 먹힌다. 또 요즘은 원전 시장이 개도국 위주로 흘러간다. 개도국은 UAE처럼 돈을 주고 원전을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 건설사 측에 직접 지은 뒤 운영해서 수익을 내라고 요구한다. 또 맞춤형 기술을 원한다. 파이낸싱과 기술을 많이 알아야 하는 시기가 왔다. cool@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7.25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⑥ 삼성생명 보험 명인 이명화 씨
운동선수 출신으로 미용실·식당·옷가게 거쳐 보험업계 투신 연간 100억원 판매, 고객 3천여명 …8년째 '名人' 타이틀 보유 연봉 수십억원, 30% 고객관리에 재투자…"첫째도 둘째도 성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생명보험협회에 가입된 국내 생명보험회사는 25개다. 이들 회사에서 일하는 FC(Financial Consultant) 즉 '설계사'는 4월 30일 기준 12만8천511명.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3만3천502명이 삼성생명에 몸담고 있다. 삼성생명은 매달 올리는 실적, 고객관리와 유지 등 10여 가지 기준을 정해놓고, 목표를 달성하는 설계사에게 '보험 판매 명인(名人)'이란 타이틀을 부여한다. 과거에는 '보험왕'이라 칭하며 연도대상 시상식을 치렀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현재 100여 명이 명인에 반열에 올라있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삼성생명 소하지점에도 명인이 있다. 주인공은 이명화(여·49) 씨. 국내 보험사 가운데 유일무이한 조선족 명인인 그는 2009년부터 8년째 이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22일 구로디지털역 인근의 한 호텔에서 기자와 만난 이명화 명인은 약속보다 20여 분 늦게 나타났다. 만나자마자 "1시간 뒤 고객과 미팅이 있다"며 "30분 정도밖에 인터뷰할 시간이 없다"고 재촉했다. 마음이 바빠진 탓에 속사포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사이에도 그의 핸드폰 진동소리는 쉬지 않고 울려댔다. "소하지점에 오던 첫해인 2009년부터 명인에 올랐어요. 10개월 만에 명인이 됐는데, 당시 연봉은 7천만 원 정도였죠. 이후 승승장구했고, 8년째 이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월 8억∼10억 원 규모의 보험을 판매하고 있고요, 고객은 3천 명이 넘습니다. 연봉은 비밀이지만 두 자릿수(수십억대)입니다." 그는 "소하지점에서 함께 일하는 40여 명의 설계사 연봉을 다 합쳐도 제 연봉을 넘지는 못한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그때까지 설계사로 일할 것이고, 끝까지 명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주변 설계사들의 시기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까지 이 명인의 삶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아청(阿城)시에서 태어난 그는 상즈(尙志)시에서 성장했다. 상즈체육대학에서 스케이트 선수를 했고, 헤이룽장 성을 대표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육상과 배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89년 조선족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나중에 배워놓으면 써먹을 수 있겠다 싶어 미용 기술을 배웠다. 실제 베이징에 이주했을 때 미용실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됐다. 임신한 뒤 염색 약품이 태아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는 사업을 접은 그는 이후 딸을 낳고는 한국 식당을 열었다. 개방이 되기 전 한국 대기업 관계자들을 상대했기에 장사는 잘됐다. 그러나 부모와 친척들이 사는 한국에 가고 싶어서 식당 문을 닫고서는 나이 서른 살에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경북 경주, 아버지는 헤이룽장 성이 고향이다. 일단 울산으로 건너온 그는 숙모와 슈퍼마켓을 차렸다. 베이징에서 한국 식당을 해 번 돈을 투자한 것이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됐지만, 주변에 조선족이 많지 않아 외로웠다. 그래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강남의 선릉에 둥지를 튼 그는 부산방직에 근무하는 4촌 오빠의 도움으로 '애리'라는 옷가게를 열었다. 사업 수완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렇다고 돈을 못 번 것은 아니었다. "큰돈은 못 벌어도 딸 아이 학교 보내고, 남부럽지 않게 뒷받침할 정도의 돈은 만졌죠. 하지만 목욕탕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사고로 옷가게도 문을 닫았습니다. 다리 수술을 두 번이나 해 1년 반 정도 휠체어에 의지했고, 이후에도 목발을 짚고, 보조기를 차고 다녔죠. 4년 정도 꼼짝을 못했습니다. 바깥 출입도 어려운 평범한 주부로 살았던 것이죠." 당시 보험을 들어놨었기에 수술비용이나 생활비 등을 충당할 수 있었다. 또 병원에 있을 때 보험사 설계사들이 병문안을 오는 것을 보고는 '참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했고, 건강이 좋아져 걸을 수만 있다면 설계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설계사들의 출발이 대개 그렇듯 이 명인도 2003년 '시험만 한번 봐 달라'는 친한 언니의 부탁에 거절 못 하고 시험을 봤다가 '코가 꿰인' 케이스다. 종로에 있는 삼성전용 대리점에 자신의 코드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설계사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만 사무실에 나갔다. "그때도 실적은 나쁘지 않았어요. 연간 3천만∼4천만 원 정도는 벌었으니까요. 그렇게 몇 년 지내다 보니 보험 사고가 터졌죠. 한데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보니 사고 수습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결심하고는 소하지점을 찾아가 교육을 다시 받았습니다." 교육 이수 후에는 무서운 상승세로 기록을 달성했다. 보험 수혜자였기에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그는 첫째도 둘째도 성실함을 내세우는 영업으로 고객들에게 믿음을 줬다. "내 계약처럼 설계를 해주는 것이 중요해요. 아무리 명품이라도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죠. 바로 맞춤형 설계가 필요합니다. 열심히 뛰면 고객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영업의 비결이죠. 고객관리요? 저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고객이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기에 성실히,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성실함으로 월 납입보험료 1천만 원이 넘는 VIP 고객을 100명 정도 유치했다. 이 명인의 계약은 80%가 소개로 이뤄진다. '성실히' 해주기 때문에 고객이 고객을 연결해 준다고 믿고 있다.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부산, 제주까지 전국에 걸쳐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고객이 이 명인을 직접 찾아와 상담하고 계약을 한다. 희한한 현상이다. 지점에서는 "저렇게 배짱영업하는 설계사는 이명화밖에 없다"고 부러워한다. 그가 지방에 있는 고객을 소하지점까지 부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 사람의 고객을 위해 부산까지 달려가면 꼬박 하루를 허비하기 때문이다. 대신 고객이 찾아오면 모든 경비를 그가 지불하고, 더 성실히 상담에 임한다. 그는 연봉의 30%를 고객을 위해 재투자한다. 고객에게 맞게 사후관리를 해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가끔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는 '진상 고객'도 있지만 될 수 있으면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보험 영업의 가장 큰 보람이란 고객으로부터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란다. "지린(吉林) 시 출신의 조선족 고객을 소개받아 계약한 적이 있었어요. 보험금 납입이 1년이 채 안 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왔죠. 아내가 간암 진단을 받았다고요. 병 문안 갔다가 노인 두 분만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죠. 자식들한테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더라고요. 아저씨는 수입이 딱 끊겨 생활은 말이 아니었어요. 아저씨는 엉엉 울면서 보험금 낼 걱정을 했죠. 그런데 앞으로 보험금은 안 내도 되고, 치료도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말했더니 아저씨는 저를 은인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힘이 절로 난답니다." 명인에게는 여러 혜택도 주어진다. 특히 여행갈 기회가 많다. 이 명인도 수도 없이 여행을 갔다 왔다. 올해에만 일본, 베트남, 유럽 9개국, 태국을 다녀왔다. 매년 6∼7차례 해외여행의 특전이 생긴다. 명인에 오르면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다. 그러나 이 명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움직이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개인 사정상 계약을 파기할 때, 말도 안 되는 얘기로 괴롭힐 때 설계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더 단단히 다진다. 3천 명이 넘는 고객 가운데 조선족은 40% 정도다. 그는 올해 들어 2월부터 팀을 새로 짰다. 6월 현재 4개월 만에 13명을 증원했다. 당연히 최우수 지점으로 선정됐다. "취미가 사람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목표가 하나 있다. "조선족이 진짜 똑똑한데 그것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조선족으로만 구성된 영업 지점을 꾸려 보고 싶은 포부다. 삼성생명뿐만 아니라 국내 전체 보험업계에서 처음 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명인은 바쁜 틈을 내서 조선족 CEO 여성 100여 명이 중심이 된 'CK 여성위원회'에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매월 봉사활동을 통해 조선족의 이미지를 바꾸는 일에도 열심이다. ghwa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7.25
한과에 미친 35년 외길 인생, 세계화 일등공신 되다
7월 '이달의 기능한국인'에 신궁전통한과 김규흔 대표 (서울=연합뉴스) 안승섭 기자 =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22일 신궁전통한과 김규흔(60) 대표를 7월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대한민국명장인 김 대표는 35년간 전통 한과를 만들어온 기술인으로서, 국내 유일의 한과문화박물관을 열어 한과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1981년 한 제과 공장의 15평 공간을 빌려 '신궁제과'라는 브랜드로 출발한 김 대표는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라는 신념으로 끊임없이 신제품과 기술을 개발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한과류 협력업체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과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세계인이 좋아하는 재료인 초코를 활용하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과자가 될것으로 보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초코한과'를 개발했다. 밀가루 약과만 있던 1990년대 3년간의 연구 끝에 쌀 약과를 개발하는데 성공해 총 5건의 특허도 획득했다. 인삼·녹초 유과, 키토산 유과, 모자이크 깨강정, 금귤정과, 녹차약과, 인삼유과, 단호박약과 등 지금까지 170여 종의 기능성 한과를 개발했다. 김 대표의 한과가 최고의 맛을 내는 비결은 그의 제작 노트에 있다. 한과 제조를 시작하면서 써온 노트에는 그동안의 한과 제작 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는 "내일이 약과를 만드는 날이라고 하면 제작노트 3년치를 꺼내서 확인한다"며 "약과를 만들 때 온도와 습도가 어땠는지, 어떤 레시피로 만들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등 3년치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내일의 날씨를 감안해 레시피를 조정한다"고 말했다. 2000년에는 한과업계 최초의 벤처기업으로 선정됐다. 2001년에는 농림식품부 신지식농업인상, 2003년에는 대통령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김 대표는 한과를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식품으로 만들기 위해 2008년 30억원을 투자해 경기 포천시에 한과문화박물관과 교육관을 개관했다. 이곳에서는 한과 만들기 체험은 물론 한과 전문인 양성 교육, 농업고등학교 멘토링, 한과문화 페스티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전문인력 양성과 한과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김 대표는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말을 후배 기술인에게 강조했다. 그는 "쌀 한 가마니의 양은 400만톨이고, 유과 한 개에는 쌀 22톨이 사용된다는 것 등 세밀한 부분까지 연구할 정도로 미쳐야 한다"며 "어떤 일을 하든지 열정을 갖고 전문성과 기술력으로 승부하면 반드시 성공이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8월 시작된 이달의 기능한국인 제도는 10년 이상 숙련기술 경력이 있는 사람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능인을 매월 한 명씩 선정, 포상하는 제도다. ssahn@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7/22 06:00 송고
2016.07.22
강신섭 대표 "외국 로펌과 손잡고 글로벌 로펌 도약"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외국 로펌은 경쟁 상대가 아닌 우리 로펌의 해외진출을 위한 '베스트 프렌즈(Best Friends)'입니다" 법률시장 3단계 개방으로 대다수 로펌들이 외국 로펌과의 경쟁에 고심하고 있지만, 강신섭(59·사법연수원 13기)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는 오히려 지금이 국내 로펌의 시장 확장을 위한 적기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이야 말로 외국 로펌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강화해 해외진출을 노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남산스테이트타워에 위치한 세종 대표변호사 사무실에서 지난주 강 대표를 만났다. 강 대표는 국내 로펌이 해외에 진출할 때는 두 가지 해외시장 확보전략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로펌의 해외진출은 현지에 사무실을 차려 직접 진출하는 것과 우수한 현지 로펌과 제휴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며 "세종은 이들 해외시장 확보전략을 현지 상황에 맞게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은 중국 베이징이나 상하이처럼 국내 로펌의 직접 진출 여건이 비교적 좋은 곳에는 한국변호사와 중국변호사를 상주시켜 시장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처럼 직접 진출하기 어려운 시장은 해당 국가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지 로펌과 협력관계를 맺은 후 국내 고객이 이 로펌을 통해 해당 국가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강 대표는 "세종은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 수십개의 외국 로펌과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와 같은 긴밀한 협력 관계는 국내에서 세종과 김앤장 정도만이 구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강 대표도 이미 국내에 진출해 자리잡은 외국 로펌들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외국 로펌의 최종 목표는 국내 로펌의 먹거리를 떼어오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 대표는 "그동안 영·미 로펌은 법률시장이 개방된 여러 국가에서 현지 토종 로펌을 흡수해 조금씩 시장을 잠식하는 방식을 써 왔다"며 "아직은 국내 진출한 외국 로펌들이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지만 한국 기업의 해외업무(아웃바운드)와 관련한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어 상당히 위협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3단계 개방 후 이들 로펌은 장기적으로 외국 기업의 국내업무(인바운드)는 물론 국내 기업의 국내 자문업무 수임을 위해 대기업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며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인재를 채용하면서 국내 주요 로펌의 전문인력을 팀 단위로 영입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우려할만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내실을 착실히 다져온 세종에게는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낙관했다. 2013년 세종 경영전담 대표변호사로 취임한 후 법률시장 개방에 대비해 꾸준히 내실을 다져왔다는 것이다. 세종의 강점은 분야별 전문성 강화 및 유기적인 조직 구성이다. 강 대표는 "지난 3년 동안 고객에게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뒀고, 외부 전문가 영입과 취약 분야 보강을 통해 경쟁력을 높였다"고 말했다. 세종은 2013년 이후 30개가 넘는 전문분야팀을 구축했다. 금융 및 증권, 부동산, 인수합병(M&A), 공정거래 등 기존 주력 분야는 물론 노동, 방위산업, 방송통신 등의 분야에서도 전문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IT전문, 통상임금, 자산관리, 프로젝트·에너지, 증권 불공정거래 등 최신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전담팀도 꾸렸다. 해외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강 대표는 "중국은 물론 동남아 시장에도 현지 사무소를 설치할 계획"이라며 "러시아나 일본, 유럽, 남아메리카 등 현지 사무소를 설치하기 어려운 국가는 국내에서 지역별 전문팀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해외 인재 영입에도 적극 투자하면서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해외 고객 확보를 위해 우수한 외국 변호사 채용에 특히 신경 쓰고 있다"며 "소속 변호사들을 해외 로펌에 파견 근무를 보내거나 해외 진출한 국내 기업에 파견하는 등의 방식으로 한국 변호사의 글로벌 역량 강화에도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hyu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7.18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⑤ 법무법인 태평양 홍송봉 변호사
헤이룽장성 소도시 닝안 출신…미국 드라마 보며 법률가 꿈 키워 "조선족은 '액체화 근대성' 집단…물처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 "韓, 해외노동력 수입 불가피…단일민족국가 고정관념 벗어나야"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3D(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분야의 산업) 종사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던 재한 조선족(중국동포)의 직업 분포가 달라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엘리트 교육을 받은 동포 3세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학계, 금융계, 무역업계, 법조계, 문화예술계 등에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조선족 하면 식당 종업원, 가사도우미, 건설 현장 막노동자 등을 떠올린다.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만 10년을 일해온 동포 3세 홍송봉(39) 변호사는 아직도 가끔 "우리나라에 조선족 변호사도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15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자리 잡은 태평양의 접견실에서 홍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오는 8월 2일이면 한국으로 건너온 지 꼬박 10년을 맞는다. 이제는 주한 중국대사관에 들를 때를 빼고는 중국 국적의 외국인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만큼 한국 생활에 동화됐지만 이따금 언론에 중국동포에 관한 부정적 보도가 나오거나 중국동포를 비하하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한국 대학생이 강연한 것을 보니 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의 범죄율은 7위에 그치고 있고, 특히 살인 등 강력범죄의 비율은 비교적 낮더군요. 그런데도 어쩌다 조선족에 의한 범죄 사건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조선족 전체가 우범자 집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정적 보도를 쏟아냅니다. 전체 숫자가 많다 보니 범죄가 잦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요." 홍 변호사는 "조선족들은 한국의 법률·문화와 국민감정을 존중하며 모범적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고, 한국의 동포들은 이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해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변호사는 세계 어디서나 엘리트 직업의 하나로 꼽히지만 홍 변호사는 중국의 최고 명문 베이징(北京)대 법학부를 나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는 1977년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牡丹江) 중류의 소도시 닝안(寧安)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할머니는 평안북도, 외할아버지는 경상남도, 외할머니는 황해도에서 건너온 전형적인 동북 3성의 조선족 이민 가족이었다. 공무원인 아버지와 도시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그리고 함께 사는 외할머니까지 출근하면 문화대혁명 때 공무원이라는 신분 탓에 호되게 시달린 외할아버지가 불편한 몸으로 어린 그를 돌보며 한글과 중국어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는 TV에서 접한 클래식 선율에 매료돼 음악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부모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과 소수민족으로서의 한계를 들어 만류하자 꿈을 접었다. 중학교에 진학해 특별활동 시간에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부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고, 클래식 감상과 트럼펫 연주는 지금도 즐기는 취미 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부에 매달린 홍 변호사는 1996년 헤이룽장성에 배정된 4명 안에 들어 베이징대 법학부에 합격했다. 2000년 졸업과 함께 변호사 시험도 통과해 법률사무소 천원(天元)에 취직했다.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도 어릴 적 TV에서 본 미국의 법정 드라마 때문이었습니다. 약자 편에 서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모습이 영웅처럼 비쳤거든요. 원시적인 힘겨루기가 사라지고 이제는 논리와 정보로 대결하는 시대입니다. 제 체구가 작아 변호사에 더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닝안은 조선족이 많지 않은 고장이었지만 부모는 그를 조선족 중고등학교에 다니게 했고 집에서도 한국어만 쓰도록 가르쳤다. 그 덕에 한국어가 능통해 자연히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나 중국 기업의 한국 투자 관련 업무는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주로 맡아온 분야는 외국인 직접투자(FDI), 기업 인수합병(M&A), 국제중재 등이었다. 한국 로펌 태평양과 함께 몇 차례 소송을 처리한 것이 인연이 돼 태평양으로 직장을 옮겼다. "2006년만 해도 홍콩을 제외하면 아시아 법률시장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었고 사법정보화도 잘 이뤄져 있었습니다. 태평양에 근무하며 한국의 성공 요인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리적으로도 한국은 동북아시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므로 제게 발전과 성공의 기회가 더 많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내는 베이징대 3학년 때 만났다. 춘절(설)을 맞아 너도나도 고향으로 향할 때 돈이 없어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남아 있다가 친구의 주선으로 무용학원에 다니던 여학생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때 눈여겨본 여학생과 자연스럽게 사귀게 됐으나 처음에는 한족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완강하게 교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남편보다 한 해 늦게 유학차 서울로 온 아내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거쳐 서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따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자녀 계획은 아내가 공부를 마치고 자리를 잡은 뒤로 미뤄놓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언어 습관의 차이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었다. 태평양에 출근하는 첫날에도 여비서가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자 '그걸 왜 묻지?'라고 속으로 의아해하며 "택시 타고 왔는데요"라고 대답해 여비서를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마트에 갈 때도 샴푸, 린스 등 일상용품에 온통 외래어가 쓰여 있어 전자사전을 갖고 다니며 일일이 뜻을 찾아봐야 했다. 법률 용어나 업무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어 곤혹스러울 때가 잦았으나 이제는 홍 변호사도 어느 정도 적응했고, 그가 속한 로펌도 국제화가 가속화돼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태평양의 변호사 444명 가운데 조선족을 포함한 외국인 변호사는 57명에 이른다. 홍 변호사도 다른 중국동포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있을 때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한국에 살 때는 외국인이자 귀환 재외동포로 경계인의 삶을 살아왔다. 정체성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에게 이달 초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서 열린 제7회 중국조선족기업가 경제교류대회 겸 제1회 조선족청년지도자 심포지엄에 참석했다가 들은 중국 중앙민족대 박광성 교수의 강연은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박 교수님께서는 '액체화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시더군요. 기존의 근대화는 부동산, 큰 공장, 대규모 기계설비 등을 통해 이뤄진 '고체적 근대화'이고, 이제는 물처럼 한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식으로 발전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그분의 이론에 따르면 중국 조선족은 선천적으로 액체화 근대성을 지닌 집단입니다. 주변에도 제 또래 조선족 상당수가 중국 전역과 한국·일본·미국·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고 현지에서 가정을 이룬 사례도 많지요. 제 남동생은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에서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통합되는 글로벌 시대인 만큼 나라의 구분이나 민족의 차이도 열린 관점으로 바와 합니다." 당초에는 2∼3년 정도 한국에 머물다 돌아가려고 생각했다가 어느덧 체류 기간이 만 10년을 맞았다. 아내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자리를 잡으면 중국으로 돌아갈 기약은 더 미뤄질 것이다. 그런 만큼 이제 재한 조선족의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고 자신의 문제가 됐다. 한국에 와서 모국의 동포에게 서운함을 느낀 적이 없었는지 묻자 즉답을 피한 채 "다른 외국인에 비해 같은 핏줄이니까 더 잘 대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 실망감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제는 한국도 단일 민족국가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추세에 따라 외부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유럽 여러 나라가 치른 홍역을 똑같이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가 통하고 핏줄이 같은 중국동포와 어울려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구현하는 제도와 관행을 확립해야지요. 나아가 주한 외국인들이 한국을 좋아하고 이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 싶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재한 중국동포 청소년들에게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말을 들려 달라고 하자 홍 변호사는 '하늘의 도는 부지런함에 보답한다'는 뜻의 '천도수근(天道酬勤)'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었다. 부연 설명을 부탁하자 "아무리 좋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도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보다는 못하다"며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지 말고 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7.18
김종진 FAO 국장 "개도국 간 남남협력 물꼬 터 보람"
태국 소재 FAO 아태지역사무소 부소장으로 전보…"한국, FAO서 역할 확대해야" "남남협력, 새로운 개발협력 모델로 급부상"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3년 반 동안 FAO 본부에서 일하며 개발도상국 간 협력을 의미하는 남남협력 정책의 물꼬를 튼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한국인 최초 고위직 진출자인 김종진(56) FAO 남남협력·재원동원 국장이 태국에 있는 FAO 아시아·태평양 지역사무소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농식품부 통상정책관(차관급)을 거쳐 2013년 2월 한국인 최초로 FAO 고위직에 진출했던 김 국장은 최근 FAO 인사에서 전보가 결정돼 3년 반 동안의 FAO 본부 근무를 마무리하고 11일 태국에서 새로운 임무를 시작했다. 태국으로 떠나기 직전 이탈리아 로마의 FAO 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김종진 국장은 "FAO에서 개발도상국 간 협력을 의미하는 남남협력 정책의 물꼬를 트고, 자리를 잡도록 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는 말로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남남협력은 호세 그라지아노 다 실바 현 FAO 사무총장이 사무총장에 선출되면서 내걸었던 주요 공약 중 하나로, 김종진 국장은 FAO의 초대 남남협력 국장의 중책을 맡아 FAO의 남남협력 정책의 시작과 안착을 이끌었다. FAO의 남남협력 정책은 현재 유엔 산하 각 국제 기구를 통틀어서도 개도국 간 협력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 국장의 3년 반 전 남남협력 국장 발탁에는 한국 전쟁 직후 농업과 산림, 수산 분야에서 FAO 회원국 중 최하 수준에 머물며 국제적 지원을 받던 한국이 불과 수 십 년만에 비약적인 발전을 해 FAO 회원국 최상위권으로 도약한 점을 FAO 내부에서 인정받은 결과라는 후문이다. 김종진 세계식량농업기구(FAO) 남남협력·재원동원 국장 김 국장은 "이제 국제 사회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종적인 개발 협력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가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횡적인 개발 협력을 의미하는 남남협력이 새로운 개발 협력 모델로서 급부상하고 있다"며 "저개발국이 계획 단계부터 공여국과 대등하게 개발에 함께 참여하고, 비용도 일부 부담하다보면 사업에 대한 애착과 자립심을 느낄 수 있어 사업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중국의 경우 올해부터 5년 동안 5천만 달러(약 578억5천만원)를 아프리카 등의 저개발국에 지원하기로 하는 등 남남협력 사업에 적극적"이라며 "중국은 저개발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현장에서 서로 부대끼며 기술 지원 등을 하다보니 끈끈한 관계가 생기고, 이런 관계는 정부 대 정부의 관계, 민간 대 민간의 관계까지 확장될 뿐 아니라 기업의 투자로까지 연결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공여국과 국제기구, 기업 등을 접촉해 FAO 사업 추진에 소요되는 예산을 따내는 게 주된 업무인 재원동원 국장도 겸임했던 그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기대가 높다"며 "한국 정부가 국제 기구에서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현재 FAO에서 한국이 내는 의무 분담금은 회원국 중 12∼13위이지만, 자발적 기여금은 20위권 밖으로 처져 있어 국력에 걸맞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FAO 내 한국인 직원 수가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내는 분담금 규모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라고 지적하며, 한국 인재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FAO 문을 두드려줄 것을 당부했다. 김 국장은 "현재 정부 부처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을 제외하고 FAO에서 정식으로 일하는 한국인 직원은 10명 남짓"이라며 "우리의 국력에 부합하려면 이 숫자를 최소 2∼3배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먹고 사는 식량 문제에 천착하는 FAO는 인류의 원초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기관이라 어느 국제기구보다 성취감과 보람이 크다"며 "전문성과 능력, 경력을 갖춘 한국 젊은이들이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태국의 FAO 아·태 지역사무소 부소장으로 새 출발에 대해서는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고, 소득 별로 편차가 매우 커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곳"이라며 "농촌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 등 해야 일이 많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한편, FAO에는 김 국장이 한국인 최초로 고위직에 진출한 이후 2013년 7월 배종하 전 한국농수산대학 총장이 FAO 베트남 국가사무소장으로 부임한 것을 비롯해 재작년 진수연 씨가 수 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산림 분야 중간급 직위인 P3로 정식 채용되고, 이은정 농림축산식품부 과장이 최근 통계 분야 사무국 직원으로 공식 부임하는 등 최근 한국인 진출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여기에 이달 초 FAO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소비자 건강 보호와 식품 공정 무역을 위해 공동 설립한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총회에서 한국이 항생제 내성 특별위원회의 의장국으로 선출되고, 주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의 주원철 농무참사관이 이달 초부터 6개월 간 FAO 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그룹의 순번제 부의장, 내년 1월부터는 의장을 맡아 활동하게 된 것 등도 FAO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ykhyun14@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7/11 16:10 송고
2016.07.13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④ 꿈을 노래하는 가수 백청강
13년 만에 이룬 '한국 가수'의 꿈…밑천은 의지·성실함 암투병 2년 공백 딛고 컴백 "간절한 꿈 있다면 도전하라"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중국 연변에서 태어난 9살 소년은 단 하나의 꿈이 있었다. 한국에 가서 가수가 되는 것.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했기에 연변의 야간 업소를 돌며 밤무대에 오르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년의 꿈은 22살 청년이 돼서야 이뤄졌다. 올해로 데뷔 5년 차 가수인 백청강 얘기다. 그는 8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올해 나이는 27살이지만 그동안 겪은 사연을 다 합치면 40살은 될 것"이라며 웃었다. 오묘한 회색빛으로 염색한 머리와 검정 셔츠 차림으로 카페에 등장한 그는 말 그대로 '아이돌 스타일'이었지만 특유의 순박한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가수 백청강(27)이 지난 8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7.11 ryousanta@yna.co.kr 가수 백청강이 걸어온 길에는 시련과 기적이 반복해서 펼쳐졌다. 뛰어난 재능과 타고난 성실함이 있었지만 주변 여건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9년 연변 훈춘시에서 태어난 조선족 3세인 그는 유년 시절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하지만 노래 실력 하나만큼은 소학교(초등학교)에서부터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면 고학년 형들까지 찾아와서 '너 노래 잘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제야 '아 내가 노래를 잘하는 거구나' 깨달았죠.(웃음) 그러다 9살 때 TV에서 HOT가 '위 아 더 퓨처'를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멋있어서. 한국에 가서 저런 가수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백청강은 쉬지 않고 도전했다. 음악학원에 다니며 밤새도록 노래와 춤을 연습했고 연변에서 열리는 오디션과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그래도 한국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그에게 주어진 무대는 연변의 야간 업소가 전부였다. "무대에 너무 서고 싶은데 기회가 없더라고요. 일단 경험을 쌓자는 생각에 밤무대에 서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내가 왜 노래하는 거지' '생계 때문에 노래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커졌죠. 그래서 마음가짐을 바꿨어요. '이게 다 가수가 되기 위한 거다' 하고요." 기적은 마지막 순간에 찾아왔다. 연변에서 청도로 가는 기차표 한 장. MBC '위대한 탄생'의 중국 오디션에 참가하려고 30시간이 넘게 걸리는 기찻길에 올랐다. 2010년 11월 백청강이 21살이던 때다.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었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가수가 되는 걸 포기하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청도 오디션을 통과하고 한국에 가게 되고, 우승까지 하게 됐어요. 무대를 즐기면서 최선을 다하려 했습니다. 도와주신 분들 덕택이죠." 백청강은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회고했지만 2011년 한국에서는 백청강 신드롬이 일었다. 22살 조선족 청년이 진심을 담아 부르는 노래에 시청자도 함께 울고 웃었다. 특히 백청강이 등장하면서부터 국내에서는 중국 동포를 향한 시선이 한결 달라졌다. 그의 소탈한 겉모습, 투박한 조선어 말투가 오히려 신선한 호감을 일으켰다. 백청강 팬클럽이 줄줄이 결성됐고, '아십니까'라는 뜻의 '앙까'라는 조선어 표현은 유행어가 됐다. 중국 동포라고 하면 무턱대고 뒷골목 범죄자를 떠올리던 편견이 조금은 옅어지고 백청강처럼 '성실한 이웃집 청년'도 많다는 긍정적 인식이 퍼졌다. "제가 조금은 벽을 깼다고 생각해요. 조선족을 향한 선입견이 없진 않았죠. 문화 차이 때문이라고 봐요. 저도 데뷔 초기엔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인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억울했죠. 연변에서는 그렇게 인사하는 문화가 아예 없었거든요. 지금은 한국 문화에 다 적응했습니다.(웃음)"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가수 백청강(27)이 지난 8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7.11 ryousanta@yna.co.kr 2012년 미니앨범 '올 나이트'로 정식 데뷔하고 방송가를 누비던 그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이 또 찾아왔다. 그해 9월 직장암 초기 진단을 받은 것. 23살의 젊은 나이였다. 몇 차례 수술 끝에 완치했지만 공백이 컸다. 2년여 동안 무대에서, 대중에게서 멀어졌다. 백청강에겐 그게 암보다도 무서웠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덤덤했어요. 치료만 잘 받으면 완쾌하리란 믿음이 있었죠. 부모님은 무척 걱정하셨지만요. 암보다도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다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더 컸어요. 그때 깨달았죠. '난 죽을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못하겠구나' 하고요." 병을 딛고 일어선 컴백 무대도 그의 삶 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지난해 MBC '복면가왕'에서 성별까지 바꾸는 반전을 선보인 것.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하던 가수가 가면을 벗자 판정단은 '경악'했다. 가면 뒤에 남자의 얼굴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여장을 처음 해봤어요. 재밌기도 했고, 관객과 호흡하면서 다시 힘을 얻기도 했죠. 이 길이 내 운명인가 봐요. 근데 힐 신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도대체 걸그룹은 어떻게 힐을 신고 댄스까지 소화하는 걸까요? 모든 여성분을 존경합니다.(웃음)" 때로는 백청강을 향한 환호가 하루아침에 질타로 돌아섰다. '위대하게 탄생한 가수'로 추켜세웠다가도 근거 없는 루머가 돌면 수백 개 악플이 달리곤 했다. 조선족의 흉악 범죄가 뉴스에 나오면 그를 향한 시선도 금세 차가워졌다.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담담하게 말할 만큼 내공이 쌓였지만 아쉬움도 영 없지는 않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오원춘 사건 때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어요. 순식간이었죠. 방송국에서 섭외 요청을 할 때도 이런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범죄는 처벌받아야죠. 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따라야 합니다. 다만 한 명의 잘못을 조선족 전체의 잘못으로 바라보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조선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지는 않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연변에는 '제2의 백청강'을 꿈꾸는 가수 지망생이 여전히 많다. 백청강은 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일까. "간절한 꿈이 있다면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한국은 기회가 많은 곳입니다. 좌절할 때가 많을 거에요.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새로운 생각을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정답이 나와요. 제가 겪어봐서 알게 됐죠." 백청강은 특유의 감미로운 음색으로 발라드부터 댄스곡까지 여러 음악을 선보였다. 요즘은 김경호 콘서트 등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하고 지역 축제에서 초청 공연도 하고 있다. 정규 앨범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모든 곡이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바꾸는" 완벽주의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자작곡을 쓰느라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그는 가장 아끼는 자작곡으로 컨템퍼러리 발라드인 'In Time'을 꼽았다. 노래는 백청강이 걸어온 길을 담담히 들려주는 듯하다. "하루가 내겐 더 너무 어두웠던 시간 속/ 가슴이 너무도 차가워진 기억 속// 하지만 멈출 수 없었어/ 어떻게든 난 널 위해서 일어날 거야"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가수 백청강(27)이 지난 8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7.11 ryousanta@yna.co.kr newglass@yna.co.kr
2016.07.11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③ 여의도가 주목하는 박옥선 씨
中식품 도매업으로 성공 발판…여행사·학원 등서 '연타석 안타' 도전·배짱으로 이룬 '코리안 드림'…"2018년엔 서울 시의원 출마"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진보나 보수가 아닌 '조선족 권익보호'가 저의 유일한 정치적 이념입니다." 중국 식품 도매업으로 시작해 여행사와 학원, 매니지먼트사 등 손대는 사업마다 잇따라 성공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40대의 조선족 여성이 있다.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 31번에 배정받았던 박옥선(49) 씨. 비록 금배지는 달지 못했지만 '조선족 출신 첫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왕 (정치를) 시작했으니 2018년 서울 시의원 선거에도 출마할 것"이란다. 박 씨는 지난 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치판에 뛰어들기까지는 저의 인생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모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는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 나갈 것"이라며 2시간에 걸쳐 자신의 삶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코리아 케이팝투어 여행사 박옥선 대표. 그는 헤이룽장(黑龍江)성 벌리(勃利)현에서 태어나 자무쓰(佳木斯)에서 성장했다. 1998년 흑룡강사범대 유아과를 졸업하자마자 자무쓰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원래 신문사 특파원이 꿈이었던 그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흑룡강신문사 객원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신문에 실화를 바탕으로 기고한 연재소설이 문제가 돼 자무쓰를 '야반도주'했다. 실제 사건의 인물들이 나타나 협박하며 마을을 떠나라고 했기에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로 떠났다. 그곳에서 지인의 소개로 한중합작기업에 취직했고, 교사와 신문사 경력을 인정받아 차관 주임(공장장) 자리를 꿰찼다. 한국인 사장 밑에서 200여 명 직원을 관리했지만 그것도 잠시, 사장이 밀수를 하다가 발각돼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박 씨는 우여곡절 끝에 1992년 11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부산 사상구에 있는 가죽염색회사를 시작으로 ,비닐제조 회사, 무역회사 등에서 일했다. 2∼3년이 멀다 하고 회사를 옮겨다니던 와중에 마음을 의지할 남편을 만났다. 그러다 1999년, 남편과 함께 서울 가리봉에서 열리는 한 모임에 참가했다가 거리에 중국 간판이 즐비한 것을 보고 별난 세상이 있음을 확인했다. "내가 살 곳은 부산이 아니라 여기(가리봉)라고 생각했어요. 더는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로 살기 싫다고 남편에게 떼를 썼죠. 그리고는 겁도 없이 주저앉았어요. 남편만 짐을 가지러 부산에 갔고, 저는 서울에 남았습니다." 서울 생활은 이력서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운이 좋게 고무 실리콘을 제조해 판매하는 회사에 취직한 그는 부산에서의 여러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3개월 만에 견적서를 내는 등 능력을 발휘했다. 월급 외 수당도 많아졌지만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회사가 적극적으로 붙잡았지만 "이제부터는 내 사업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2001년 초 가장 먼저 뛰어든 사업은 '한중식품'이란 이름을 내건 중국식품 도매업이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궁리 끝에 오토바이를 사서 가리봉, 구로, 대림동 일대 중국 식당을 직접 찾아갔다. 도매 허가도, 오토바이 운전 면허증도 없이 무모하게 살던 때였다. "초짜인 저에게 누가 물건을 사겠어요. 아무도 없었죠. 오히려 동포들이 저를 밀어내는 거예요. 한 바퀴 돌고 나면 사무실에 와서 펑펑 울었죠. 그러다 남들과 차별화를 해야 산다는 생각을 했죠. 1박스에 1만2천원 하는 컵 술을 40박스씩 구매하기보다는 1천 박스를 한 번에 구매해 납품가를 떨어뜨리면 이익이 많이 날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또 소매상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매일 3만원어치씩 과일과 야채를 사서 돌렸어요." '어디 쌓아 놓을 데도 없는데, 무슨 여자가 통이 그렇게 크냐'는 남편의 불평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6개월 만에 투자한 돈을 전부 회수한 것은 물론 1년 만에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살 정도의 돈을 벌었다. 그 사이 거래처를 빼앗긴 도매상들이 구청과 경찰서에 신고해 여러 차례 불려가 곤욕을 치르고, 머리끄덩이 부여잡고 싸움도 했지만 중국 식품 도매업계는 어느덧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박옥선 대표가 업무와 관련해 직원과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 2004년 출입국관리법이 강화돼 동포들이 중국으로 빠져나가면서 식품유통업도 내리막길을 탔다. 권리금을 받고 사업체를 넘긴 그는 다른 비즈니스로 눈을 돌렸다. 2002년 온 가족이 국적신청을 하면서 경험했던 일이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이 됐다. 당시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신청서를 작성할 줄 몰라 대필을 부탁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박 씨도 대필을 해줬고, 동포들이 고맙다며 5만원, 10만원씩 호주머니에 꽂아주고 갔던 일을 기억하고는 이를 합법화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나여행사'(현재 코리아케이팝투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여행사에서 일을 본 동포들이 인근 중국식당에 가 친구도 만나고 사업 얘기도 나누는 것을 보고는 식당 '한중관'도 차렸다. 여행사와 식당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두 곳에서 하루 3천만 원 이상 매출을 올릴 정도였다. 내친김에 중국어학원도 문을 열었고, 당시 불어닥친 케이팝 열풍을 놓칠세라 매니지먼트사인 '케이팝 서울학원'도 오픈했다. 중국에서 학생들을 끌어들여 케이팝을 체험하게 하고, 오디션을 통해 아이돌을 배출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전국구'와 '삼순이'는 그가 키워낸 엔터테이너이다. 박 씨의 사업은 중증호흡기증후군(SARS)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등의 영향을 받아 한때 주춤하기도 했지만 비교적 꾸준한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그의 삶에도 변화가 왔다. 앞만 보고 달려온 생활에서 벗어나 주변을 살펴볼 때가 됐음을 느낀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족 동포사회의 부정적 인식부터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보다는 기존 사업을 유지하면서 보람된 일에 투자하기 시작했죠." 우선 '한나협회'를 창립했다. 남성 청년 동포들에게는 축구단을 만들어 줬고, 여성에게는 구로구청이 운영하는 장애인센터에서 매월 2차례 음식을 만들어 나눠주고 청소하는 봉사단을 꾸리게 했다. 국제라이온스협회 354-D 지구(210개 클럽)에도 가입했고, 회장으로도 활동(2012년 7월 2일∼2013년 6월 30일)했다. 조선족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조선족 CEO 여성 100여 명이 중심이 된 'CK여성위원회'도 창립했다. 매월 봉사활동을 통해 조선족의 이미지를 바꾸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는 이외에도 서울특별시 서남권 글로벌센터 명예센터장, 사단법인 서울 구로구 소상공인회 이사, 재한동포유권자연맹 여성위원장 등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박 씨를 눈여겨본 정치권은 그에게 앞다퉈 러브콜을 보냈다. 먼저 새누리당에 영입됐고, 20대 총선을 앞두고서는 더민주에 스카우트됐다. 박 씨는 자신에게 당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정치를 통해 조선족의 위상을 높이고,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란다. "누가 저에게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100만 명에 이르는 중국동포의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대답할 겁니다. 동포들이 한국에 기여하려면 편히 정착할 수 있는 관련법부터 손질해야 하는데 결국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이 되는 길밖에 없잖아요. 2018년 제 생각을 실현해준다면 어느 당(黨) 후보로든 시의원 선거에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2년뒤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해야죠." 박옥선 대표는 집무실 벽에 자신이 활동한 여러 사업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사진을 붙여놨다. ghwa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7/04 07:00 송고
2016.07.07
"중동식 컵밥 맛 어때요?"…이집트서 한식 열풍 일으킨 한인셰프
양중희 요리사 카이로서 유명세…2주 한 번꼴로 무료 급식도 중동 전문 연구원도 합류해 '중동식 컵밥' 개발 (카이로=연합뉴스) 한상용 특파원 = "이슬람 율법 조리법인 할랄에 맞게, 라마단까지 고려해 개발한 맛있는 중동식 컵밥입니다." 중동의 인구 대국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컵밥 하나로 한식 열풍을 일으킨 한국인 요리사가 화제다. 주인공인 이집트에서 2012년부터 4년 넘게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사로 활동해 온 양중희(40) 셰프.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저 전속 요리사 3년 경력과 한국문화원 요리 강사 1년 근무 경험을 토대로 카이로 도심 타흐리르 광장 인근 '그릭(Greek) 캠퍼스'에서 '코리포차'를 운영하고 있다. 라마단 단식이 끝나갈 때쯤인 3일 오후 7시께(현지시간) 이 포장마차에는 이집트 청년과 여학생 등 12명이 줄을 서 컵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불고기를 얹은 컵밥과 떡볶이를 산 에스라 무함마드(21.아인샴스대 대학생)는 한국어로 "엄청 맛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식 간식입니다"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친구 사마르(21.여)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곳에 와 컵밥을 먹는다"며 "한국 요리를 통해 한국 문화도 알게 되는 느낌이 들어 더욱 맛있다"고 웃음을 지었다. 이 포장마차는 이집트인과 유럽 출신 외국인들이 주로 근무하는 이 캠퍼스 일대에서는 이제 명물이 됐다. 한류 팬들에게는 일종의 '성지'로 인식될 정도로 유명 음식점으로 떠올랐다. 카이로뿐만 아니라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에서 손님이 찾고 있으며 라마단 이전엔 하루 평균 60~80명가량이 포리코차를 이용하고 있다. 전체 6개월의 준비 기간과 3개월간의 메뉴 개발을 통해 얻은 결실인 셈이다. 양 셰프는 이집트인 입맛에 맞게 불고기와 채소, 치킨, 해물, 참치, 카레, 자장 등 7종류의 컵밥을 개발했다. 가격은 현지 사정을 고려해 모두 25이집트파운드(약 3천200원)로 같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불고기를 얹은 컵밥으로 전체 판매의 약 70%를 차지한다. 매콤달콤한 떡볶이와 이집트 가게에서 파는 면을 이용한 한국식 라면과 김밥은 별미 음식으로 인기다. 이들 메뉴는 가격이 20~25이집트파운드(약 2천600백원~3천200원) 수준으로 손님들의 요청으로 직접 개발했다. 이슬람식 할랄 음식으로 제공하기 위해 컵밥 소스와 라면 스프는 오랜 연구 끝에 특별히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이 음식들이 현지인 입맛을 사로잡고 '한국산 별미'라는 소문이 서서히 퍼지면서 양 셰프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다. 게다가 2주일에 한 번꼴로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동네 청소부, 정원사, 수위 아저씨 등에게는 무료로 컵밥을 나눠주면서 '천사 셰프'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페이스북으로 알게 된 이집트인 친구는 현재 4천500명에 달한다. '코리포차'를 4개월간 운영하면서 팔로어가 1천500명 급증한 것. 그가 한국문화원을 비롯해 이집트에서 한식 요리법을 가르친 제자만 해도 200여명에 이른다. 유명세를 타자 이집트 방송사가 올해 2차례나 양 셰프를 초대해 요리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한식조리 기능사를 딴 뒤 유명 한정식집 용수산에서 요리사로 일한 경력도 있는 양 셰프는 "이집트에서 한국 문화와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코리포차를 차리게 됐는데 호응도 좋아 기쁘고 보람도 느낀다"고 말했다. 이 가게를 운영하면서 4차례 정도 국내외 대형 음식점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외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지금 정착하는 단계에 있고 지금의 도전이 즐겁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이집트에선 생소한 컵밥을 소개하기로 한 이유는 중동에서 한국의 새로운 음식 문화를 알려주고 싶은 도전 의식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에게 한국 음식의 독창적인 맛과 컵밥의 편리성을 알려주는 동시에 저렴한 가격으로 현지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마음도 작용했다. 이집트와 한국의 젊은이들이 음식으로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도 보람으로 생각했다. 대학 때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딴 양 셰프는 "컵밥을 먹은 손님들이 고마워하고 '맛있다'는 얘기를 해 줄 때면 절로 힘이 난다"면서 "코리포차가 잘 정착을 하면 2~3호점을 내는 것도 검토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중동 연구원으로 이집트에 9년째 거주하는 최재훈(37) 연구원도 이 포장마차가 안착하는데 크게 한 몫 거들었다. 최 연구원은 포장마차의 입지 선정은 물론 마케팅과 조직 관리 등 후방에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다. 양 셰프와는 2014년 카이로에서 열린 '국제 요리 페스티벌' 대회에 함께 참가한 것을 계기로 협력 관계를 돈독히 해 왔다. 최 연구원은 "한국 음식에 대해 막연히 알거나 아예 모르는 이집트인들에게 컵밥을 통해 한국 음식과 문화를 알리게 돼 기쁘다"며 "현지에 맞게 개발한 한국의 맛은 세계 어디에서도 통할 수 있다"라고 자신했다. 이집트서 컵밥으로 유명해진 한국인 셰프(카이로=연합뉴스) 한상용 특파원 = 3일 오후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컵밥 전문점인 '코리포차'를 운영하는 양중희 셰프. 2017.7.5 이집트서 컵밥 열풍 일으킨 한인 셰프 (카이로=연합뉴스) 한상용 특파원 = 3일 오후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컵밥 전문점인 '코리포차'를 운영하고 있는 양중희 셰프와 창업 동료인 최재훈 연구원. 2017.7.5 컵밥 즐기는 이집트인들(카이로=연합뉴스) 한상용 특파원 = 3일 오후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컵밥 전문점인 '코리포차' 앞에서 이집트인들이 컵밥을 먹고 있다. 2017.7.5 gogo213@yna.co.kr
2016.07.05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③ 여의도가 주목하는 박옥선 씨
中식품 도매업으로 성공 발판…여행사·학원 등서 '연타석 안타' 도전·배짱으로 이룬 '코리안 드림'…"2018년엔 서울 시의원 출마"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진보나 보수가 아닌 '조선족 권익보호'가 저의 유일한 정치적 이념입니다." 중국 식품 도매업으로 시작해 여행사와 학원, 매니지먼트사 등 손대는 사업마다 잇따라 성공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40대의 조선족 여성이 있다.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 31번에 배정받았던 박옥선(49) 씨. 비록 금배지는 달지 못했지만 '조선족 출신 첫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왕 (정치를) 시작했으니 2018년 서울 시의원 선거에도 출마할 것"이란다. 박 씨는 지난 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치판에 뛰어들기까지는 저의 인생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모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는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 나갈 것"이라며 2시간에 걸쳐 자신의 삶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코리아 케이팝투어 여행사 박옥선 대표. 그는 헤이룽장(黑龍江)성 벌리(勃利)현에서 태어나 자무쓰(佳木斯)에서 성장했다. 1998년 흑룡강사범대 유아과를 졸업하자마자 자무쓰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원래 신문사 특파원이 꿈이었던 그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흑룡강신문사 객원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신문에 실화를 바탕으로 기고한 연재소설이 문제가 돼 자무쓰를 '야반도주'했다. 실제 사건의 인물들이 나타나 협박하며 마을을 떠나라고 했기에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로 떠났다. 그곳에서 지인의 소개로 한중합작기업에 취직했고, 교사와 신문사 경력을 인정받아 차관 주임(공장장) 자리를 꿰찼다. 한국인 사장 밑에서 200여 명 직원을 관리했지만 그것도 잠시, 사장이 밀수를 하다가 발각돼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박 씨는 우여곡절 끝에 1992년 11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부산 사상구에 있는 가죽염색회사를 시작으로 ,비닐제조 회사, 무역회사 등에서 일했다. 2∼3년이 멀다 하고 회사를 옮겨다니던 와중에 마음을 의지할 남편을 만났다. 그러다 1999년, 남편과 함께 서울 가리봉에서 열리는 한 모임에 참가했다가 거리에 중국 간판이 즐비한 것을 보고 별난 세상이 있음을 확인했다. "내가 살 곳은 부산이 아니라 여기(가리봉)라고 생각했어요. 더는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로 살기 싫다고 남편에게 떼를 썼죠. 그리고는 겁도 없이 주저앉았어요. 남편만 짐을 가지러 부산에 갔고, 저는 서울에 남았습니다." 서울 생활은 이력서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운이 좋게 고무 실리콘을 제조해 판매하는 회사에 취직한 그는 부산에서의 여러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3개월 만에 견적서를 내는 등 능력을 발휘했다. 월급 외 수당도 많아졌지만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회사가 적극적으로 붙잡았지만 "이제부터는 내 사업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2001년 초 가장 먼저 뛰어든 사업은 '한중식품'이란 이름을 내건 중국식품 도매업이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궁리 끝에 오토바이를 사서 가리봉, 구로, 대림동 일대 중국 식당을 직접 찾아갔다. 도매 허가도, 오토바이 운전 면허증도 없이 무모하게 살던 때였다. "초짜인 저에게 누가 물건을 사겠어요. 아무도 없었죠. 오히려 동포들이 저를 밀어내는 거예요. 한 바퀴 돌고 나면 사무실에 와서 펑펑 울었죠. 그러다 남들과 차별화를 해야 산다는 생각을 했죠. 1박스에 1만2천원 하는 컵 술을 40박스씩 구매하기보다는 1천 박스를 한 번에 구매해 납품가를 떨어뜨리면 이익이 많이 날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또 소매상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매일 3만원어치씩 과일과 야채를 사서 돌렸어요." '어디 쌓아 놓을 데도 없는데, 무슨 여자가 통이 그렇게 크냐'는 남편의 불평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6개월 만에 투자한 돈을 전부 회수한 것은 물론 1년 만에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살 정도의 돈을 벌었다. 그 사이 거래처를 빼앗긴 도매상들이 구청과 경찰서에 신고해 여러 차례 불려가 곤욕을 치르고, 머리끄덩이 부여잡고 싸움도 했지만 중국 식품 도매업계는 어느덧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박옥선 대표가 업무와 관련해 직원과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 2004년 출입국관리법이 강화돼 동포들이 중국으로 빠져나가면서 식품유통업도 내리막길을 탔다. 권리금을 받고 사업체를 넘긴 그는 다른 비즈니스로 눈을 돌렸다. 2002년 온 가족이 국적신청을 하면서 경험했던 일이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이 됐다. 당시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신청서를 작성할 줄 몰라 대필을 부탁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박 씨도 대필을 해줬고, 동포들이 고맙다며 5만원, 10만원씩 호주머니에 꽂아주고 갔던 일을 기억하고는 이를 합법화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나여행사'(현재 코리아케이팝투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여행사에서 일을 본 동포들이 인근 중국식당에 가 친구도 만나고 사업 얘기도 나누는 것을 보고는 식당 '한중관'도 차렸다. 여행사와 식당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두 곳에서 하루 3천만 원 이상 매출을 올릴 정도였다. 내친김에 중국어학원도 문을 열었고, 당시 불어닥친 케이팝 열풍을 놓칠세라 매니지먼트사인 '케이팝 서울학원'도 오픈했다. 중국에서 학생들을 끌어들여 케이팝을 체험하게 하고, 오디션을 통해 아이돌을 배출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전국구'와 '삼순이'는 그가 키워낸 엔터테이너이다. 박 씨의 사업은 중증호흡기증후군(SARS)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등의 영향을 받아 한때 주춤하기도 했지만 비교적 꾸준한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그의 삶에도 변화가 왔다. 앞만 보고 달려온 생활에서 벗어나 주변을 살펴볼 때가 됐음을 느낀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족 동포사회의 부정적 인식부터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보다는 기존 사업을 유지하면서 보람된 일에 투자하기 시작했죠." 우선 '한나협회'를 창립했다. 남성 청년 동포들에게는 축구단을 만들어 줬고, 여성에게는 구로구청이 운영하는 장애인센터에서 매월 2차례 음식을 만들어 나눠주고 청소하는 봉사단을 꾸리게 했다. 국제라이온스협회 354-D 지구(210개 클럽)에도 가입했고, 회장으로도 활동(2012년 7월 2일∼2013년 6월 30일)했다. 조선족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조선족 CEO 여성 100여 명이 중심이 된 'CK여성위원회'도 창립했다. 매월 봉사활동을 통해 조선족의 이미지를 바꾸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는 이외에도 서울특별시 서남권 글로벌센터 명예센터장, 사단법인 서울 구로구 소상공인회 이사, 재한동포유권자연맹 여성위원장 등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박 씨를 눈여겨본 정치권은 그에게 앞다퉈 러브콜을 보냈다. 먼저 새누리당에 영입됐고, 20대 총선을 앞두고서는 더민주에 스카우트됐다. 박 씨는 자신에게 당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정치를 통해 조선족의 위상을 높이고,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란다. "누가 저에게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100만 명에 이르는 중국동포의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대답할 겁니다. 동포들이 한국에 기여하려면 편히 정착할 수 있는 관련법부터 손질해야 하는데 결국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이 되는 길밖에 없잖아요. 2018년 제 생각을 실현해준다면 어느 당(黨) 후보로든 시의원 선거에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2년뒤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해야죠." 박옥선 대표는 집무실 벽에 자신이 활동한 여러 사업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사진을 붙여놨다. ghwang@yna.co.kr
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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