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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EUN에서 더 나은 성장을
기업명
NAEUN GARMENT(KUNSHAN) CO,. LTD.
국가
담당업무
사무업무
작성자
김지인
기수
5기
작성일
2019.06.21

중국어에는 체득(体会)이라는 표현이 있다. 중국인에게 진정한 앎이란 알다의 (知道)가 아닌 몸으로 익혀서 할 수 있다(体会)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전공수업 중 들었기 때문에 크게 와 닿지 않았을 뿐더러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었다. 그리고 나은에 입사한 뒤 하루하루 체득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한상인턴십에 대해 알게 된 것은 4학년 막 학기 누구나 졸업 후 백수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감으로 벼랑 끝에 내몰리는 그 시점, 나 역시 그러할 때 참여하게 된 설명회에서 알게 되었다. 해외 취업이라는 분야는 사실 외국어를 전공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한 번 쯤은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랬다. 당시는 4기를 뽑고 있었는데 THAAD등이 문제로 중국은 뽑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5기를 뽑을 때 반드시 지원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그 곳에서 하게 되었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나는 졸업을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5기 공고가 떴다. 이를 위해 자소서도 처음 써보고 취업사진도 처음 찍었다. 모든 것이 처음 하는 일이었고 선발 된 뒤 내가 여기서 겪은 모든 일들도 다 처음배우는 것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6개월 동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배운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의류벤더라는 분야의 직무, 수직수평관계가 공존하는 오피스에서 살아남는 법, 사회생활 그리고 중국어. 크게 보면 이 4가지를 크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의류벤더라는 분야의 직무에 대해서 말해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의류벤더라는 직무가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옷에 대해선 택에 있는 생산 국가를 보며 막연히 ‘아, 옷을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었네?’ 생각만 하였지 옷의 디자인이 어떻게 되는지, 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확인절차와 소통이 오가는지 몰랐었다.


내가 처음 만든 옷  HMT52745

내가 처음 만든 옷 HMT52745



사무실의 내 책상 5시에 메일을 써야한다

사무실의 내 책상 5시에 메일을 써야한다


SAMPLE LIST 4월~9월까지의 샘플

SAMPLE LIST 4월~9월까지의 샘플



내가 이 곳에 와 처음 배운 것은 원단의 길이를 재는 것이었다. 원단에는 앞 뒤가 있다. 원단이 처음 제조 될 때 어느 방향으로 꽂혔는지에 따라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 전공도 아니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처음 사수가 말하는 것에 40%도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히 원단길이에 관한 것도 족히 8번은 물어봤을 것이다. 나의 사수는 중국인이었고 그녀는 하다하다 종국엔 짜증이 조금 섞인 친절을 보이며 인내심 있게 알려줬다. 가까스로 이를 제대로 잴 수 있게 되었을 때 벌써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온 지 일주일이 흐르고 처음으로 내 앞으로 뉴샘플이 오게 되었다. 이의 제작과정 역시 간단하게 시작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렇다. 수많고 많은 원단 중 바이어가 원하는 재질의 원단을 찾아내는 것이 제작의 첫 번째 스텝으로, 이를 얻기 위해 또 다른 외주업체에 연락을 하고 외주업체에서 또 찾아내면 3~4일 정도 소요된다. 이후 옷의 패턴을 뜨고 원단을 가져다주고 만들어서 미국으로 보내면, 옷 한 벌, 판매용도 아닌 샘플용을 만드는데 일주일 정도 걸린다. 그 과정을 한눈 팜 없이 꼼꼼하게 봐야만 한다. 중간에 하자가 없는지, 바이어의 요구대로 하고 있는지 하는 등의 일말이다. 처음에는 혼도 많이 났다. 옷에 관한 엑셀파일을 날려버리던가 하면 원단을 전혀 늘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잘라서 바이어에게 보내는 바람에 바이어가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또, 그렇게 꼼꼼함을 요구하는 뉴샘플도 덜렁대고 확인을 제대로 안하는 바람에 스타일 넘버가 임의로 변경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저 뉴샘플 만드는 일이 제일 쉽다. 이렇게 실수를 하고 혼나는 과정에서 뉴샘플을 만드는 과정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바이어와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재밌던 부분은 미국과 중국이 시차가 난다는 것 이었다. 어떠한 문의사항을 지금 당장 보낸다면 답변은 그 다음날 아침에서야 받을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일 할 때 이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재밌긴 하지만 단점으로도 생각 될 수 있는 이 ‘시차’는 한국 의류벤더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내용이었다. 의류벤더라는 분야를 알게 되면서 이러한 기사를 이전에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 생각하며 넘겼었는데, 지금은 내용의 한 글자 한 구문 절절히 공감하는 바이다.

우리 오피스는 수직수평관계가 한 사무실 안에 공존한다. 내가 일 한 오피스는 1과로 총 10명이 근무하고 있다. 10명 중 두 명은 인사팀이고 나머지 8명이 벤더 업무를 보고 있는데 나와 차장님을 제외 하고 모두 중국인이다. 현재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말을 듣더라도 오피스 내에서 친구처럼 대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고 만약 경력직이 들어오게 될 경우 자신의 위에 가게 되어 상하관계 비슷한 분위기가 생긴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곳은 존댓말이 없는 중국어의 특성 때문일까? 한국어가 통하는 차장님 외에는 딱딱한 수직구조의 분위기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였다. 나도 항상 내 사수를 부를 때 언니, ~씨, 이런 표현을 전혀 쓰지 않고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며 비교적 편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차장님의 경우 한국어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나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부터 단어선택까지 꼼꼼히 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질문을 할 때마다 몸이 절로 경직되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또 직원들과 소통할 때 중국어를 편하게 하게 되니 사장님과 직원들이 섞여서 이야기를 업무지시를 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사장님 말에 나도 모르게 “嗯嗯.” (응!) 이렇게 대답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이후 수직관계에 대한 나의 경직도는 더욱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도 결국 사장님이 한국인이고 나머지 직원들이 모두 중국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어디서는 해볼 수도 없는 경험이라 생각한다.

“지인씨, 우리는 부모님이 아니에요.” 내가 이곳에서 차장님께 혼날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당시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 ‘그걸 누가 몰라?’ 이런 반발심이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 일 것이다. 사소한 것 부터 큰 것까지 매 번 혼날 때마다 차장님께서 하신 말을 곱씹으며 그럼 모르면 가르쳐 줘야할 거 아니야? 하는 사회초년생의 설움이 담긴 생각을 줄곧 했다. 그러나 차장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다면 아무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나는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고 나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몸으로 직접 부딪혀서 익혀야 하는구나! 마치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번뜩 깨달은 것이다. 열심히 기술과, 현장반, 재료반 사람들과 소통하며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물건이 오는 것인지 직접 다가가 말로 소통하면서 배웠다. 그리고 전달 할 필요성이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메일을 쓸 때에도 3번은 더 읽으면서 제목은 제대로 썼는지, 첨부파일은 제대로 보냈는지, 참조는 똑바로 했는지도 확인했다. 누군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오피스 안의 동료들에게 나는 그냥 새로 들어온 일하는 사람이지 일일이 보살펴 줘야하는 그들의 아이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며 실수를 연발하고 그에 대한 질책을 들어가며 사회생활의 일부분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아침 포털 사이트에 [신입사원이 자주하는 실수]라는 제목의 블로그 글을 읽게 되었는데 내용부터 그것에 대한 댓글까지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이 없었다.

마지막, 중국어에 대한 이야기다.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있어 그 나라에 가서 직접 부딪히며 배우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교환학생이나 자체 어학연수를 거치지 않는 이상 1학년 1학기에도 할 수 있는 말은 “니하오.” 졸업 할 때에도 할 수 있는 말은 “니하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나는 교환학생을 22살 때 갔다 왔고 돌아온 이후 거의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국어를 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국어만 말하는 입이라면 거미줄이 쳐질 정도? 내가 속한 1과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차장님 단 한 분 뿐이셨다. 차장님에게는 필요한 질문 이외에는 가급적이면 소통을 하지 않았고, 외국어를 배우는 방향에서는 운이 굉장히 좋게도, 그 외 나머지 소통은 모두 오피스 내 중국인들과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너무나 오랜만에 중국어를 쓰는 것이라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애를 먹었다. 부끄럽기도 하였고 내 말을 혹여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내가 처한 환경은 무조건 몸으로 부딪혀서 알아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이었고 나는 ‘중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외국인’이 되기로 했다. 이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한데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사전달을 제 1의 목표로 삼게 되면 말을 할 때 부담감이 훨씬 적어지게 된다. 나는 이만큼 전달할거야, 쉬운 말로 이 사람을 이해시키자, 발음에 신경 쓰지 말고 표현에 신경을 쓰자. 스스로 되뇌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쓰는 패션용어도 점점 입에 익게 되었고, 처음엔 한국어로 된 지시서를 동료에게 통역하는 과정에서 바디랭귀지 90% 언어 10% 정도였으면, 지금은 바디랭귀지 30% 언어 70% 정도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사실 체감상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보다 더욱 중국어가 다듬어 진 것 같다. 이는 인턴생활에서 굉장히 만족스럽게 생각된 있는 부분이었다.

 이번 인턴십은 지금의 나를 4월의 나 자신보다 더 성장시켰고 성숙해 질 수 있도록 해준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4월 17일, 한국에선 겨우 꽃샘추위에서 벗어나 봄다운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시기, 나는 에어컨을 쐬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중국의 남방으로 왔다. 처음 짐을 풀고 정리를 할 때 10월은 좀 선선하려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돌아갈 날이다. 앞으로 한국의 취업전쟁에 참전해 치열하게 싸워나갈 날만이 남았는데 이 곳의 6개월은 그 미래의 예고편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예고편으로 보았으니 그 결과와 해결방법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이곳에서 얻은 가장 큰 이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