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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로운 시작
기업명
Urban Planning Concept DBA the code solution (in)
국가
담당업무
Architecture
작성자
유재민
기수
3기
작성일
2019.06.21


2017년, 개인적으로 다사다난한 시간들이 지나고 또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열정과 꿈만 좇을 뿐, 명확하고 구체적인 생각이나 계획 없이 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 30살이 되었을 때, 흔한 대학졸업장 함께 흔한 직장인이 되어있었다. 재수 끝에 건축학과를 입학하고 졸업하면서 진로를 결정하였는데 나는 예술적인 건축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내가 잘하는 분야로서 건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안타깝게도 내가 택한 길은 사회적으로 전도유망한 업은 아니었기에 이 선택에 다른 길이 있었을까 하는 약간의 후회를 늘 간직했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아주 흔하게 경험하는 그런) 종종 나는 “다시” 라고 외쳤다. 과제를 하다가도 “다시”, 술을 먹다가도 “다시”, 여자친구하고 다툴 때 조차 “다시...”, 그렇게 무언가를 새롭게 재생하는 의미로서 ‘다시’ 하곤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게 해외 인턴쉽의 선택은 ‘다시’ 한번 나를 상기시키고, 내가 무엇을 하고싶은지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처음 미국행에 관한 제안을 들었을 때의 나는 3년정도 건축현장에서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좋은 회사를 만나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도 가져보았고, 한국에서 결혼과 미래의 삶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겨울날, 존경하던 선배의 부름에 정말 오랜 기간 동안 다시한번 나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새벽에 쫓기듯 일어나 출근버스에 몸을 맡기고 막차버스를 또 다시 쫓기듯 타서 집에가거나 막차를 놓쳐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거의 3개월을 고민하다 간만에 얻은휴가로 갔던 미국에서 결정을 하였다. ‘다시’ 시작하기로.


미국으로 가는 준비과정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한상재단을 알기 전에도, 알고 난 후에도 각종 절차들은 나를 괴롭혔다. 우선, 미국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취업비자가 필요한데, 비자 이전에 회사에서 승인을 해주는 과정 역시 포함되어있었다. 해외(미국)에서 일한 경험이 전무한 나는 언어의 문제부터 어떤 일을 어떻게 하냐에 관한 문제가 가장 컸었는데, 나에게 제안을 준 선배를 통해 전반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약 6개월간 일한 소감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아직은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큰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2017년 6월 비자와 함께 인트락스 재단을 통해 알게된 한상재단 청년 인턴쉽까지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3기 인턴쉽 오티를 참가하면서 나름 함께 미국을, 혹은 세계 다른 나라로 인턴쉽을 가는 동기들을 만나고 재밌는 교육도 받았던 것같다. 그렇게 나는 뜨거운 여름 LA에 도착하였다.



인턴 유재민 사진1

# Live by myself.



처음 LA에서 살게 된 집은 선배가 쓰던 집이었는데, 마치 대학때 자취하던 삶으로 돌아온 것 같아 여전히 즐거웠다. 가구를 사고, 가전제품을 맞추면서 나름 행복했던 것 같다.(여전히 진행중이다.)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설레고 두려운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여전히 감사하다. LA는 미국에서도 한인 인프라가 가장 좋은 곳인데, 한인타운에서 장을 보거나 술을 한잔 할때면 너무 한국스러워서 크나큰 단점이자 장점인 것 같다. 집에서 밥을 해먹거나 혹은 밖에서 사먹을 때도 한식을 포함한 다양한 음식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인 것 같다. 여기에 세계 최대 인터넷 쇼핑몰인 아마존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미국을 선택할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땅이 넓어 예로부터 자동차 문화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교통 역시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우버(Uber) 택시의 저렴하고 편리한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턴 유재민 사진2

# Wooden Structure



본격적으로 시작한 미국에서의 실무는 한국과는 조금은 다른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건축의 구조가 대부분 목구조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 혹은 경량 철골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목구조에 관한 디테일에 관해서는 새로이 공부를 해야만 했다. 미국의 건축은 놀랄만큼 한국과 비슷했는데 목구조로 만드는 건물의 디테일들은 제한적인 콘크리트와 다르게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해서 재미있었다. 분업화 되어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미국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는데, 내가 일했던 한국의 실무에서는 건축과 시공의 경계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탔던 것에 비해 미국은 철저하게 건축과 시공, 시행이 분리되어 있는 형태였다. 또한 대관업무가 굉장히 난해한데, 한국의 간편한 시스템(역시 IT강국!)과 달리 모든 도면을 굉장히 큰 사이즈로 출력해서 도면을 뽑아가는 시스템은 여전히 성격 급한 한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또한, 미국의 여러 가지 기본단위가 한국과 다른데 길이, 넓이, 무게, 부피, 온도, 속도 등 모든 단위의 적응이 어려웠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특수하게도 한국에서 소규모의 작은 집을 위주로 했던 것과는 다르게 규모가 큰 시행회사들과 아파트(한국에서의 연립주택)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조금은 낯설었다. 내가 경험했던 한국의 건축실무는 조금 더 건축주와 건축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작업이었다면, 지금 미국에서 내가 하는 일들은 어떻게든 빠르고 효율적이게 그러면서도 괜찬은 건축을 시장안에서 가치있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미국과 한국의 차이라기보다는 어찌보면 회사의 성격 그리고 또 그 안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지금의 일은 꽤 재밌다.



인턴 유재민 사진3

# SSN(Social Security Number)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시작하면서 한국의 주민등록증처럼 필요한 것이 나를 증명하는 신분증이다. 사회보장번호라고 말하는 이 번호는 나의 경제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었고, 이를 신청하는 것은 매우 간단했지만 한국의 친절함이 매우 그리웠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는 모든 노동의 서비스에 대한 팁(Tip)을 받는데, 그래서인지 팁을 받지 않는 서비스들은 너무나 질적으로 차이가 떨어진다(마치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미국이 각박하고 합리적이며 자본주의적 성격만 띄는 것은 아니다. 거리를 걷다가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한국에서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같은 아파트의 사람들과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오고내리면서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인턴 유재민 사진4

# Homemade Food



미국의 장바구니 물가는 한국과 확연한 차이가 있는데, 한국에서 보다 더 푸짐하게 장을 보더라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정말 싸다!). 단, 외식을 하게되면 한국보다 더 비싸지는 것은 주의해야할 항목. 직장 동료 생일에 초대받아 같이 음식을 해먹거나, 미국의 대표적인 공휴일인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새해에는 함께 모여 음식을 해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인턴 유재민 사진5

# Outdoor Activity



그 밖에도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놀러갔던 Joshua Tree National Park에서의 캠핑, 사촌동생과 함께한 Chicago, 주말에 답사를 갔던 Beverly Hills 등 모두 잊지 못 할 추억이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다시’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나는 늘 조급했었다. 더 빨리 해보려고 노력했고, 젊었을 때 많은 경험을 경쟁자보다 더 많이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를 누군가와 비교했었다. 그 결과에 항상 좌절했었다. 미국에서 6개월간,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인생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국 생활의 꿈이며 목표이고 해외로의 취업에 관한 즐거움이다. 해외에 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사실 크게 와닿지 않는다. 해외의 전도유망한 일자리라는 것은 결국은 그 사회의 전체에서 오는 파이의 크기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난 그렇기에 내가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의 균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하지않는 시간에서 조차 경쟁했었던 지난날들의 미련함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삶은 180도 달라져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것이 절대적으로 한국과 다르다고 느꼈는데 적어도 미국에서 나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나의 책임하에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어야하고, 또 그 안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긍정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꼭 미국에서만 국한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6개월이 지난 내 인생에서 가장 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지금, ‘다시’ 후기를 쓰며 빠르게 지나가버린 미국의 삶을 돌이켜보고 지금에 오기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재외동포재단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국가 재단을 통해서 온 것에 대한 뿌듯함과 함께 항상 감사하며 더 많은 꿈을 좇는 청년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인턴쉽은 종료되었지만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던 순간을 잊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