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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노강(怒江)
작성일
2024.01.26

단편소실 대상


노강(怒江)

차준희(중국)


“试管婴儿?(시험관 ?)  听说那个是很不容易的.(그거 많 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괜찮을까?) 我一次也没考虑过.(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好的.(알았어.) 我们慢慢考虑 吧.(그래, 천천히 생각해 보자.) 祝你过愉快时间, 替我问候 姑妈. 我挂了.(당신도 좋은 시간 보내고 고모님에게 안부 전 해줘. 그래, 전화 끊을게.)”


아내와의 통화가 끝나고 입고 있는 등산복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팔짱을 끼고 동승석 등받이에 기댄 채 잠시 상념에 잠겼다. 운전을 하던 와띠는 고개를 돌려 잠시 나를 한 번 쳐다봤다. 우린 중국 운남성의 서쪽 고속도로를 벌써 10시간째 달리고 있는중이었다. 와띠가 크게 좌회전을 해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 절벽 밑 도로를 달렸다. 내 눈 에 마침내 노강이 들어왔다. 난 햇빛 때문에 붙여 놓은 햇빛 가리개를 떼어 옆 창문으로 밖을 감상했다. 말로만 듣던 흙 탕물의 노강이 보였다. 폭 30여 미터의 노강은 무섭게 우리 가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바위에 부딪 치며, 또 높이 튀어 오르며 무겁고,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내눈엔 마치 화가 난 듯 보였다. 어렸을 적 난생 처음 폭포 를 봤던 기분, 그 기분과 같았다.


잠시 이런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운전하던 와띠는 진담 반 농담 반 내게말을 던졌다.


“작년에 왔을 때는 이 노강에 하루 만에 차 세대가 떨어 졌어요. 물살이 강해 한번 떨어지면 시신 찾기도 힘들어서 떨어진 근처에서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죠.” 말하고 나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다시 운전을 계속해 나갔다. 내가 다시 노강을 보자 강이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나는 슬그머니 손 잡이를 꼭 잡았다.
중국 운남성 리주족자치구의 노강협곡! 그곳을 삼십 여 분 달려보니 정말 위험한 곳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로의 왼쪽은 산사태가 많이 난 듯한 우뚝 선 절벽이었고 오른쪽은 무섭게 노강이 흘렀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 아닌 좌우양난 (左右兩難)의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겁이 난 나 는 몇 번이나 와띠에게 조심해 운전하라고 당부했다.


한참을 달리던 중 목이 마른 나는 물을 마셨고 다른 생 수병 뚜껑을 따와띠에게도 건네주었다. 그 순간 작은 승합 차 하나가 우리 차를 불쑥 추월하고는 또 앞에 지나가고 있는 소형 트럭을 추월하려 했다. 뒤에서 보던 나는 그곳이 일 차선 도로이고 바로 앞에는 모퉁이가 있어서 반대편에 차가 나타난다면 너무나 위
험한 상황이라 생각했다. 역시나 반대 편 모퉁이에서 큰 버스가 나타났다.놀란 버스 운전기사는 사정없이 클랙슨을 울렸다. 승합차는 브레이크를 밟아 가까 스로 속도를 줄여 트럭 뒤로 다시 숨어 들어갔다. 이런 위험한 추월 장면을 그날 오후 자주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손의 땀을 바지에 닦아 냈다. 그러고는 나를 이런 위험천만한 곳 에 데려온 내 ‘좋은 친구’ 와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와띠는 내가 살고 있는 곤명에서 만난 중국 리수족 친구 이다. 내가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서 쌀국수 집을 하고 있 다. 쌀국수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자주 와띠의 식당을 이 용하게 되었고, 부부 동반으로 만날 정도로 서로 친한 사이 가 되었다. 와띠가 종종 자기 고향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아 서 난 꽤나 큰 호기심을 전부터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노강 지역은 외국인이 여행으로 다녀오기엔 거리상으로도, 편의 상으로도 쉽지 않아 몇 번의 제의를 포기했었다. 그러던 중 그 해 중국 국경절 휴일을 맞아 고향에 갈 계획이던 와띠는 나와 꼭 같이 가고 싶다며 다시 나를 초대했다. 몇 달 전 아 내와 한국으로 가서 살 것을 결정한 나는, 하고 있던 사업도 대부분 정리해 시간이 넉넉했다. 때마침 아내도 몸이 불편한 고모님을 도우러 고향으로 잠시 가 있게 되어 머나먼 여행에 응하고 말았다.


내가 중국 곤명에 온 지 벌써 11년이 넘었다. 중국에 와 서 아내를 만나 결혼한 지 7년차이다. 아직 아이는 없었다.


빨리 갖고 싶었지만 세상일이 정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 내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전에 병원 에 가 검사를 해 봤는데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 제가 없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면서도 또 다른 걱정거리였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중 와띠는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서행시 켰다. 앞을 보니 한 노인네가 검은 염소 수십 마리를 몰고 가 고 있었다. 이 위험 천만한 도로에 염소까지 끼어들다니 나는 이마를 치며 실소를 하고 말았다. 노인은 지팡이로 염소를 몰고 있었다. 옷은 낡은 소수민족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마 리수 사람의 전통 복장인 듯 보였다. 리수족에 대해 잘 모르 지만 자기 언어가 있고 자신들만의 전통 문화가 있는 민족으 로 알고 있다. 중국 내에는 자신만의 문화와 언어를 가진 소 수민족이 적지 않게 있다. 소수 민족은 생김새도 일반한족 과는 좀 다르다. 이 리수 사람은 눈도 크고 선이 굵은 외모를 가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노강이 남쪽으로 여러 다른 나 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이국적인 생김새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차는 염소가 놀라지 않게 살며시 추월해 다시 노강 도로를 달렸다.


곤명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는데 저녁 7시가 다 되어 우 리는 마침내 와띠의 고향인 ‘산나’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우 뚝 솟은큰 산들이 우리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평지 는 없었다. 평평한 곳은 노강과 노강 옆의 도로뿐이었다. 주위를 둘러 본 나는 아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와띠의 집 으로 가려면 우
리 앞에 우뚝 선 큰 산을 올라야 했다. 늦은 저녁 노강의 거대하고 웅장한 산 아래 선 나는 정말 작아지 는 기분이었다.
와띠는 차를 도로변의 한 상점 옆에 세웠다. 내가 걱정이 되어 이곳에 세워도 괜찮냐고 묻자 상점 주인이 친척이라 차 를 봐줄 것이라 했다. 와띠는 우리가 먼저 외삼촌 집에 가 그 곳에서 ‘투어라지’라는 것을 타고 산을올라야 한다고 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우리 둘은 마음은 급했다. 가방 을 짊어 진 우리는 산 아래 논둑을 조심조심 걸어 외삼촌 집 으로 향했다. 5분쯤 논두렁을 걸어 우리는 도착했다. 그곳 에서 나는 투어라지를 처음 보게 되었다. 경운기처럼 시동 을 거는 작은 트럭이었다. 낡아 보이는 외관이 그리 믿음직 스럽진 않아 보였다. 이미 투어라지 짐칸에 올라 탄 와띠는 나에게 운전할 외삼촌 옆에 타고 가라 했다. 난 경치도 구경 할 겸 짐칸에 같이 타고 가고 싶다 했고 와띠는 내 손을 잡 아 나를 짐칸으로 끌어 올렸다. “텅텅텅” 소리를 내며 투어라 지는 산길을 올라갔다. 한 시간쯤의 가파른 산행이었다. 산 길을 올라가다 보니 왜 와띠의 차는 이 산길을 올라갈 수 없 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경사도 높고 흙길이라 사륜 지프차 는 되어야 그나마 천천히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삼십 여분쯤 오르자 우리가 달려왔던 노강이 저 아래에 보였다. 경치가 어두운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런 행복한 감상도 잠시. 투어라지의 바퀴가 수백 미터 높이 의 절벽 끝을 닿아 아슬하게 달리는 광경을 발견한 나는 다시 긴장하고 말았다. 투어라지의 바퀴는 흙을 낭떠러지에 많 이도 떨구며 산을 올랐다. 낭떠러지 근처에서 후진을 할 때 에는 정말 오금이 저려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 시간쯤을 올라 투어라지는 마을 앞에 도착했다. 와띠 와 나는 짐을 챙겨 투어라지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인사를 하러 운전석 삼촌에게 갔다. 인사만하고 바로 헤어질 줄 알 았는데 삼촌과 와띠는 리수말로 한참을 대화했다. 대화를 마친 와띠는 내게 말하길 친척 중 하나가 위암에 걸렸는데 위중하다고 했다. 외삼촌과 잠깐 들러 보고 가고 싶다는 것 이었다. 나를 먼저 집에 데려다 주고 갔다 온다 했지만 나는 같이 가고 싶다 했다. 우리는 산등성이를 올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간 마을은 ‘자자’라고 부른다. 투어라지 같은 차량은 그곳까지만 오를 수 있고 그곳에서 몇십 분 내려가면 ‘부부’라는 와띠의 고향 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위쪽으로 삼십 분쯤 올라가면 ‘우에멍’이라는 위쪽 마을이 있다. 그 산지 에는 세개의 마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을을 가르는 길로 들어섰다. 깊은 산속의 마을이 처음이기도 했고 어둑해서 그런지 마을이 더욱 신비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 좌우에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곤명 근처에도 많은 농촌지역이 있지 만 이렇게 오래된 나무 오두막집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오두 막집의 백열전구가 불그스름한 빛
을 내고 있었다. 나무로 낮 게 둘러처진 울타리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보였다. 방금 밭일을 끝내고 돌아온 듯한 사람이 손발을 씻고 있었고, 또 다른 집은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와띠와 외삼촌은 동네 사람들을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화화” 이 말이 리수 인사말이었다. 와띠와 외삼촌은 자기가 사는 마을이 아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걸어가던 중 와띠는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오십여 미터 앞에 다른 집과는 좀 떨어져 있는 작은 오두막을 가리켰다. 이름이 ‘푸꽁’이라는 우리가 가려는 암환자의 집이라고 내게 알려 주었다. 와띠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그 집으 로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갑자기 어린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주위 다른 오 두막에서 사람들이 플래시를 들고 나와 바쁜 걸음으로 그 암환자 푸꽁의 집으로 향했다. 좋지 않은 소식을 예감한 우 리도 빠른 걸음으로 푸꽁의 집으로 향했다. 바쁘게 가는 와 중에도 와띠는 내가 넘어질까 걱정하여 내 발에 핸드폰 플래 시를 비춰 주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이미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대부분 이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 집은 12평쯤 되는 방 하나짜리 오두막이었다. 안은 어두침침했다. 가운데 걸린 백열전구 하나가 12평을 다 밝게 비춰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 가운데는 꺼진 화로가 있었고 오른쪽 구석에는 요리를 하 는 듯한 선반과 조리 기구가 보였다. 가운데 창문 아래는 침대가 있었고 이 허름한 침대 위에는 푸꽁이라는 사람이 배를 움켜잡고 고통스럽게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얼굴은 검고 핼쑥했다.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고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에 아들로 보이는, 초등학교 6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자기 몸보다 몇 치수 더 큰 얇은 점퍼를 입고 울고 있 었다. 그리고 침대 아래는 한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헝클어 진 긴 머리를 한 소녀가 침대를 등지어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조금 전 여자아이의 비명소리는 이 아이의 목소리인 듯했다. 아빠가 배를 잡고 구르며 신음하자 비명소리가 터져 나와 버렸을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더 들어와 어 느새 집안이 가득 채워졌다. 주위를 둘러 보던 나는 문득 아 내로 보이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그런 생각 을 하고 있을 쯤 갑자기 정적을 깨는 발자국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여 한 발을 끌고 다른 한 발 로 땅을 쿵쿵 찍으며 걷는 발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 람이 누군지 아는 듯 동요가 없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을 쳐다봤다. 오래 빨지 않은 듯한 두꺼운 옷을 입은 한 백발의 노인이 작은 멍석을 들고 불쑥 문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환자가 누운 침대 앞에 멍석을 깔고는 냅다 옆으로 턱을 괴고 누워 버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뻐 끔대며 암환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내겐 정말 해 괴한 장면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요동하지 않았다. 이 노 인이 뭘 하는 것인지 누구인지 궁금해졌지만 누구에게 물어 볼 상황이 아니었다.


십여 분의 큰 진통 후에 곧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던 그암환자 푸꽁은 다시 평온을 찾고 조용히 잠에 들었다. 잠시 후 동네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묵상을 하더니 하나 둘씩 익 숙하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모두 돌아갔지만 이 담배 피우는 노인은 여전히 담뱃대를 물고는 같은 자세로 환자를 보고 있었다. 와띠는 이미 잠든 푸꽁의 침대로 다가가 측은 히 바라보고는 나를 불러 내게 푸꽁과 그의 가족을 소개해 주었
다. 암환자 푸꽁은 와띠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아들은 이싸, 딸의 이름은 아스마였다. 그리고 여전히 멍석 위에 누 워 있는 노인네를 돌아 보고는 그는 암환자 푸꽁의 아버지라 알려줬다. 난 그 노인네가 암환
자의 아버지라고 전혀 예상하 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진정되자 두 아이들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어린딸 아스마는 고사리 손으로 큰 주전자를 들어 우리에 게 물을 따라 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와띠는 리수말로 아이들과 인사한 후 지갑에서 돈을 꺼내 이싸에게 내밀었다. 이싸는 받지 않았다. 와띠는 돈을 이싸의 주머니에 구겨 넣 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작별을 하고 문을 나왔다. 와띠외 삼촌이 투어라지로 텅텅거리며 밤길을 헤치며 집으로 내려간 후 우리는 와띠의 집으로 향했다.


와띠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앞에 막힌 것이 없이 터져 있어서 밤하늘이 잘 보였다. 별로 가득한 밤하늘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직장 다니던 시절 천문 관측 모임에 참여해 강원도 횡성에 가서 별을 본 후 그렇게 많은 별 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별빛에 감동하는 순간 문득 방금 전 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 노인네가 푸꽁의 아버지였다니!’ 그가 암환자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니 좀 기괴하게 생각 되었던 장면이 문득 이해가 되었다. 담배를 열심히 빨고 있 던 모습은 ‘아들아 너 많이 아프냐? 나도 너무 아파서 담배 를 피우지 않으면 난 이 상황을 이겨낼 수가 없구나!’ 턱을 괴고 크게 눈을 뜨고 환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은 ‘아 들아 너 조만간 날 떠나니?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이렇 게라도 더 보고 싶구나!’ 이런 마음속의 해석이 떠올랐다. 예 전 내 한국의 사촌 형이 30대 초반에 혈액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큰아버지의 표정이 흡사 이 노인의 모습과 비슷했었 다. 눈물이 없는 눈이었지만 난 그 큰 아픔을 큰아버지의 눈 에서 볼 수 있었다. 인륜지사는 세상 어디에나 동일함을 깨달으며 별빛이 비 춰지는 깊은 산길을 와띠와 나는 내려갔다.
우리는 와띠 부모님의 집에 도착했다. 와띠 부모님은 그 지방 악센트가 강한 중국어로 내게 밥은 먹었냐며 인사하 며 나를 반겨 주셨다. 내가 등에 진 배낭을 내려 놓고 있는 사이 와띠는 방금 전 푸꽁 집에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말씀 드렸다.
와띠 부모님은 걱정이 되었는지 밤이 늦었지만 바로 푸꽁의 집에 다녀올 준비를 하셨다. 부모님은 금방 다녀 온 다며 와띠에게 나를 잘 챙길 것을 당부하며 나가셨다. 푸꽁이 마을 사람들에게 큰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다시 금 알수 있었다.


와띠의 집은 오두막이 아닌 시멘트 집이었다. 거실도 주 방도 구분되어 있었다. 첩첩산중에 있는 집치고는 꽤나 괜찮은 집이었다. 와띠가 나를 안내해 내가 머물 방으로 갔다. 방 문을 열자 와띠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듯 보이는 잠 자리가 보였다. 작은 침대에 좀 두툼한 꽃무늬 이불이 세로 로 접혀 있었고 옆에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 다. 배낭을 의자 위에 올려 놓고 핸드폰을 들어 보니 저녁 9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 11시는 넘어야 침대로 향 했던 나지만 그날은 이미 온몸에 피로가 가득했
다. 간단히 씻고 나는 침대로 올라갔다. 꽤 피곤했지만 그날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산속이라 잘 마르지 않은 이불의 축축한 기운과 처음 느껴보는 낯선 느낌으로 인해 오랜 시간 뒤척여야 했 다. 그러던 중 도
착하고 아내에게 연락하지 못한 것이 생각 나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를 하려고 보니 내가 쓰는 통 신사는 그곳에서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그날 밤은 아내와 의 통화를 포기했다. 많이 뒤척였던 그날
밤 잠이 들기 전 내 머리 속에는 푸꽁과 그의 가족들이 다시 떠올랐다.새벽부터 우는 수탉 소리에 나는 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살며시 떠 보니 창문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오 고 있었다. 이미 늦은
아침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나는 이불 속을 나왔다. 슬리퍼를 신고 작은 거실로 나왔다. 그곳에서 나를 반긴 것은 풍경 사진에서나 볼 법한 탁 트인 멋진 산들이었다. 어젯밤은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에 이런 멋진 풍경이 날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 다. 수많은 산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산들은 무늬가 있었 다. Z모양의 무늬.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흙길의 모양이 그수를 먹는 동안 마당에서 옥수수를 말리며 와띠는 어머니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어제 그 암에 걸린 친척, 푸 꽁에 관해 얘기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얘기를 끝낸 와띠는 내게로 와 푸꽁이 두 달 전쯤 병원에 갔 었는데 두세 달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고 내 게 전했다.


내가 아침 식사를 마치자 와띠는 마을 구경을 하고 싶냐 고 물었다. 전날 하루 종일 이동한 피로감이 풀리지는 않았 지만 나도 빨리 마을과 산을 구경하고 싶었다. 내가 카메라 의 배터리가 충분한지를 확인해 카메라 가방에 넣은 후 우 린 바로 문을 나섰다.
이 산의 고도 4분의 3 지점에 와띠의 마을이 있다. 이십 여 분 올라가면 전날 갔었던 푸꽁이 있는 ‘자자’ 마을이 있 고, 한 시간쯤 더 오르면 이 산의 꼭대기에 이를 수 있었다. 우리는 와띠의 마을을 둘러보고는 다시 자자 마을로 올라갔 다. 마을을 관통하는 길을 지나고 옥수수 밭 옆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우리는 위로 올라갔다.
자자 마을도 보고 그 위의 마을도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다.


“나와 같이 곤명에 몇 개월 같이 사신 적도 있어요. 그런 데 적응을 못하시더라고요. 중국어도 힘들어하시고…. 짐을다 꾸려서 곤명에 왔다가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와 버리셨어요.” 


부모님과 함께 곤명에 살 생각이 없느냐는 말에 와띠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이곳에서 일평생 산 사람이 도시의 삶에 적응하기는쉽지 않을 것이다. 소나무가 좌우로 서 있는 좁은 오솔길을 올라가며 와띠는 이전에 얘기하지 않았던 자기 얘기를 내게 털어 놓았다. 실은 얘기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었다. 와띠는 곤명에 있는 3년제 전문대를 마치고 직 장을 구하던 중잠시 아르바이트로 쌀국수 집에서 일을 했 는데, 일도 잘하고 싹싹해 주인아주머니의 눈에 들었고 그 가게 매니저로 정식 일을 하며 여차여차 주인 딸과 결혼까 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 후장모는 쌀국수집 분점을 내어 와띠에게 주었다. 그곳도 장사가 아
주 잘 되었다. 아내 는 한족이고 부부관계는 나쁘지 않지만 자기 마을에 오는 것은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춘절에나 한번씩 오곤 한다 고 했다.


등산하던 일요일 날씨는 그렇게 덥지 않았다. 하지만 고 산지대였기 때문인지, 어제 반나절을 달려온 피로함이 여전 히 있어서인지 산을 오르는 것이 꽤나 힘겨웠다. 나의 힘든 표정을 본와띠는 내게 자주 쉬고 갈 것을 권했다. 경사가 급한 오솔길을 15분쯤 올라 소나무 숲을 벗어나자 ‘자자’라고 불리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날 우리가 투어라지에서 내린 곳이었다. 가파른 비탈길에 지어진 오두막집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었고 그 밑에는 좁고 긴 계단식 논들이 거대한 빌딩처럼 깔려 있었다. 어디서 쉽게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장 관이었다. 누구라도 자자 마을을 본다면 아름답게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지낸 지난 십여 년간 한국 면적 의 네 배 크기인 운남성 이곳저곳을 많이 다녀 봤었다. 하지 만 그런 특별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몇 컷을 사진기에 담았다.


사진을 찍는 사이 옆에 있는 수풀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 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두 명의 어린 남자아이 가 큰 바구니를 짊어지고 나왔다. 감자가 담긴 바구니를 등 에 졌는데 특이하게 줄을 어깨에 맨 것이 아니라 이마에 걸 치고 조랑말이 걷듯이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걸어 왔다. 얼 굴에 장난끼 가득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앞을 지나가며 우리 둘을쳐 다본 후에 와띠를 알아차리고는 ‘화화’로 인사를 하며 다시 열심히 걸어갔다. 내 눈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아 이들이 숲으로 다시 사라지자 나는 바로 와띠에게 바구니 줄을 왜 어깨에 매지 않고 이마에 걸쳐 매지 물어봤다. 와 띠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산기슭이 가 파르니 어깨에 매는 것보다 이마에매는 것이 더 편하지 않 을까요?”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나는 이마에 매 는 자세와 어깨에 맨 자세를 취해 보고는 이해했다는 듯이 긍정적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곳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가? 한낮인데 일을 하고 있 네.”


호기심에 이렇게 물었다가 바로 중국 국경절 휴일인 것 이 생각나서 “아!지금은 국경절이지?”라고 혼자 대답했다.


“여기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과 달라요. 여긴 부모님이 시 키면 아이 않는 날에는 집안일을 돕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죠.”


이런 대화를 하던 중 와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고는 “소나기가 몰려 오고 있네요.”라고 말하며 손가락으 로 먼 산 위의 하늘을 가리켰다. 뿌옇게 보이는 뭔가가 있었고 이 뿌옇게 보이는 뭔가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소나기 라고 와띠는 말했다. 그것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 였다. 와띠와 나
는 급히 자자 마을로 들어갔다. 와띠는 가는 길가의 밭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에게 리수말로 뭔가를 말 했다. 몇몇은 밭일을 멈추었고 몇몇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마 큰 소나기가 오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고 바람도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내인생 경험상 이 상황은 비가 오기 딱 3분 전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계단 식 논 옆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마을로 올라갔다. 마 을 입구에 도착할 때쯤 큰 빗방울이 내가 쓴 모자에 떨어졌 다. 이곳에서 홀딱 젖으면 참 난감하겠다는 생각에 나는 정 신 없이 와띠를 따라 갔고 우리는 근처 한 오두막집 문 앞까 지 정신 없이 내달렸다. 오두막의 처마에 다다르자 소나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 며 나는 안도했고 흘린 이마의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 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가 비를 피하는 집은 어제 왔던 푸꽁의 집인 듯 보였다. “여기 푸꽁의 집 아니야?” 내가 묻자 와 띠는 그렇다고 답했다. 푸꽁 몸은 괜찮을까 생각이 들 무렵 방안에서 쉰 목소리로 크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 마 푸꽁의 목소리는 아니겠지?’ 어제 밤 죽을 정도로 아팠던 푸꽁이기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일거라 생각하며 나는 호기 심 속에 내 옆에 있던 창문으로 가 오두막 안을 들여다봤다. 침대에 앉아 화가 나 보이는 푸꽁과 멀뚱히 서 있는 아들 이 싸, 눈물을 훔치고 있는 딸 아스마가 보았다. 푸꽁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와 와띠를 발견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들어오라 손짓하고는 다시 딸 아스마를 쉰 목소리 로 나무랐다.우리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푸꽁은 잔기침을 하며 기력이 다했는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들 이싸는 그 을음으로 뒤덮인 주전자에 있
던 물을 컵에 따라 아버지 손 이 닿을 수 있는 박스 위에 올려놓았다.와띠는 내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아스마는 일을 잘 안하고 놀기를 좋아해요. 예전에도 이렇게 자주 아빠한테 혼이 났어요.” 조금 전
혼이 난 아스마가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데 이렇게 내게 직접 말 해버리니, 아스마가 상처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슬그머니 아스마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얼굴엔 눈물 자국이 여전한데 내 눈과 마주치자 웃음을 짓는 것이 아닌가? 아스 마는 한눈에 봐도 건강해 보이는 검은 긴 머리카락을 가졌 다. 생긴 것은 이 아이도 조상 중에 인도에서 건너왔으리라 확신되는 그런 인도 미녀의 얼굴을 가졌다. 이싸도 동생과 비슷한 이미지인데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 더진하게 생겼 다. 산 위에서 자외선으로 얼굴은 검게 탔지만 참 잘 생겼다 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싸는 우리를 위해 방 한가운데 있는 모닥불 옆에 작은 나무의자를 놓아 주었다. 와띠와 나는 의 자에 앉았고 아스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녹차가 든 컵에 물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다. 와띠는 들고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려 할때 내가 환자 앞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나무랐다. 와띠는 다시 담배를 담뱃갑에 넣고는 혼잣말하듯 뒤쪽 에 있는 푸꽁과 대화를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대화를 했 다. 나름 심각해 보이는 둘의 대화 내용은 내가 알 수 없었지만 ‘이싸’, ‘아스마’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찻잎이 너무 많이 들어가 다소 쓴 녹차를 음미하며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대화는 꽤 길어졌다.


비가 그치자 두 아이들은 문을 나서려 했다. 와띠는 염소 에게 먹이를 주러 나가는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원래 아침 에 아스마가 해야 할 일인데 하지 않아 아빠에게 혼이 난 것 이라고 했다. 중
국어로 말하는 와띠의 말을 이해했는지 아 스마는 겸연쩍게 웃음 짓고는 구석에 있던 바구니를 들고 문 을 나갔다. 아이들이 나가자 나는 푸꽁에게 몸은 괜찮은지 물었다. 중국어가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듯한 40대 중반의 푸꽁은 어제보다 괜찮아졌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잔기침을 했다. 괜히 환자를 힘들게 했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와띠 는 모닥불의 남은 재를 막대기로 휘휘 저으며 나도 들으라는 듯 중국어로 푸꽁에게 말했다.


“형수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요. 이싸와 아스 마는 몸이 안 좋은 할아버지가 키울 수도 없고 참 난감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와띠는 나를 바라봤다. 


“형수는 우 리가 어제 지나온 노강에, 타고 있던 트럭이 떨어져 세상을 떠났어요.” 


와띠의 충격적인 말에 난 놀랐고 누워 있는 푸꽁 을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우리 세 사람은 잠시 적막 가운 데 있었다. 와띠도 분위기가 어색 한 것을 느꼈는지, 대뜸 푸 꽁네 옆집이 자기 친구 집인데 그곳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 다. 우리는 일어서 돌아누워 있는 푸꽁에게 인사하고 문을 나섰다.


우린 이삼십 미터 거리의 와띠 초등학교 동창 ‘이구아’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갑자기 이렇게 찾아가도 괜찮은 거냐 묻자 와띠는 자기 고향에서는 아무 때나 찾아가도 전혀 실례가 아니라고 답했다. 식사 때 불쑥 찾아가 같이 끼니를 해결한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이구아의 집도 와띠의 집과 같이 시멘트 집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의 구멍가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라면과 간식거리 등 몇 가지 물품을 거실에 놓고 팔았다. 그 중에 가장 잘 나가는 것은 포장된 닭발이었다. 내가 있는 동안 2명의 여자 아 이가 와서 닭발을 사 물어 뜯으며 이구아의 집을 나갔다. 이 구아는 트럭도 갖고
있었다. 가게의 물건을 나르기도 하고 다른 집이 부탁하면 돈을 받고 여러 가지 물건을 시내에서 옮겨오기도 한다고 했다. 눈이 정말 동그랗고 건장한 체격의 이구아는 참 쾌활해 보였다.
이구아의 집에서 가장 기억 남는 것은 리수마을에서 한 국어 ‘아가씨’라는 단어를 들은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이 구아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가씨’라는 단어를 여러번 말했다. 뜻은 다르겠지만 이 ‘아가씨’라는 단어를 중국 노강 산 위에서 들으니 신기했다.


난 와띠에게 호기심 가득 물었다. “아가씨가 리수말로 어떤 뜻이지?” 와띠는 내게 대답했 다. “ ‘아가’는 ‘닭’, ‘씨’는 ‘죽이다’란 뜻이에요.닭 잡으라고 말한 거예요.” 난 와띠에게 한국어로 아가씨가 어떤 뜻인지 얘기해 줬고 와띠도 흥미로워했다. 우리가 거실에서 차를 잠깐 마시며 대화하고 있는 동안 이구아의 아내는 이미 목을 비 틀어 죽인 닭을 들고 대문으로 들어왔다. 종종 걸음으로 마당을 횡단해 닭을 손질할 수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구아 의 아내는 준비된 뜨거운 물로 능숙하고 빠르게 털을 벗겼 다. 칼을 들어 배를 가르고는 내장 손질을 마치고는 남편 이 구아에게 넘겼다. 이구아는 넘겨받은 닭을 부엌으로 가져 가 큰 칼로 산산조각 내어 조리를시작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는 저녁까지 이구아의 집에 있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아들인데 이렇게 암에 걸리게 되다니. 참 안타까울 뿐이야.” 


백주를 한 모금 마신 이구아는 술이 반쯤 취해 이렇게 말했다. 푸꽁은 형이 둘이 있었는데 한 명은 사 고로 한 명은 자살 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두 아들 을 떠나 보내고 마지막 남은 막내 아들까지 또 이렇게 보내 는 푸꽁의 아버지를 동네 모든 사람이 너무나 안타깝고 측 은해 한다고 이구와는 말했다. 푸꽁
아버지의 아픔이 다시 내게 느껴졌다.


40도 백주에 얼큰히 취한 나는 “와띠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어. 여러 곳을 여행해 봤지만 이런 고향의 냄새가 나는 곳이 정말 좋아.꼭 한국 어릴 적 내 고향에 돌아온 듯해.” 이 말을 들은 이구아가 내밥그릇에 삶은 닭고기 한 조각을 얹어 주고는 싱긋 웃으며 내게 자주 오라고 했다.


“그래 나 정말 이후로도 자주 오고 싶어.”

 

난 취기 속에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셋이 즐거워하고 있던 그때 그리 멀지 않은 어디선가 문득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게 어디선가 들어 본 곡조인 듯했다. 난 젓가락을 든 채 미간을 찌푸리며 뭔 노래인지 생 각해 내려 안간힘을 썼다. 이구아는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 리키며 “교회 예배시간이에요.” ‘교회라고?’ 교회라는 말에 난 노래를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이 났다. 내가 어렸을 때 할 머니와 교회 다닐 때 자주 들었던 찬송가였다. 와띠와 이구
아도 한국에서도 교회에서 같은 노래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다. 와띠와 이구아가 술자리 대화를 이어 나갔고, 나는 어둑해진 저녁 잠깐 산책하고 들어오겠다며 이구아 집 을 나섰다. 교회가 있는 곳
에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이런 산 속에 교회가 있다는 자체가 내게 흥미로웠다. 무작정 노래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올라갔다. 이구아의 집을 나와 올라가 던 중 젊은 여자 두 명이 염소를 몰고 내려오고 있었다
. 염소 무리에게 길을 잠시 내어 주고는 다시 올라갔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조금 더 올라가자 땅이 잘 정돈된 10 0평 가 량의 평지 위에 교회가 있었다. 작은 목조 건물이었고 그 안 의 백열등이 차분히
안을 비춰 주고 있었다. 교회 안에는 사 람들이 꽤 많은 듯 보였다. 나는 흥미로운 이끌림 속에 그곳 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 간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창문 뒤로 비스듬히 섰다. 그
리고 안을 들 여다봤다. 앞에는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인도를 하고 있었다. 참석 인원은 대략 삼십 명쯤 되어 보였다. 내 앞에는 백발의 할머니와 손자로 보이는 아이가 경청을 하며 앉아 있 었다. 다시 옛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겠 지만 어려서 할머니를 따라 얼마간 교회를 다녔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교회 문턱도 다시 밟은 적이 없었다. 이런 저런 옛 생각을 하는 중에 내 눈에 눈에 익은 사람들이 또 들어왔다. 오전에 봤던 푸꽁과 두 아이도 그 자리에 있었다. 푸꽁은 힘이 들어 노인네와 같 이 몸을 굽히고 어렵사리 앉아 있었다. 내 눈엔 종교의 힘이 라도 빌리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보였다.푸꽁이 기침을 하자 두 아이는 푸꽁을 걱정하며 바라봤다. 내가 푸꽁이 걸을 수 있는 힘이 아직 있는 건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창문 안푸 꽁은 갑자기 배를 쥐어 잡고는 고통스러워했다. 아이들은 놀 라며 아빠의 팔을 잡았고 앞에 앉은 사람들까지 모두 뒤를 돌아 푸꽁을 쳐다봤다. 잠시 후 고통이 좀 사그라들었는지 푸꽁은 고개를 들어 괜찮다고 사람들에게 표했다. 아빠 옆 에 있던 이싸는 창문 밖의 누군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싸에게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다시 이구아의 집으로 내려온 나는 와띠의 큰 삼촌이 우리를 초대한다 하여 그곳으로 가 밤이 새도록 먹고 마셨다. 새벽에야 우린 플래시를 비추며 자자 마을에서 와띠의 마을 인 부부 마을로 내려왔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나는 지끈한 머리를 잡고 침대 에서 일어났다. 물을 마시려 부스스한 모습으로 부엌으로 들 어갔다.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와띠는 나를 보자마자 오 늘은 다른 곳에 놀러 가자
했다. 나는 우스꽝스럽게 아픈 머 리에 손을 대고 아직 쑤시는 허벅지를 주물러 보였다. 와띠 는 “걱정 마세요. 오늘은 외삼촌의 투어라지를 타고 노강 건너편의 앞산으로 갈 거예요.” 투어라지를 타고 이동한다는 말에 나는 안도와 걱정이 함께 들었다. 걷지 않아도 좋지만 또 한동안 긴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와띠는 앞산에 있 는 친구 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이기에 오후에 출발 할 것이라고 했다. 와띠의 부모님은 아침 일찍 나가서 산에 서 땔감을 준비하고 계셨다. 와띠는 친구 집에 가기 전 산에 올라가 잠시 부모님을 돕겠다고 했다. 와띠는 방으로 들어 가 허름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집을 나와 오솔길 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가는 길에 작은 배나무를 발견했 다. 와띠는 내게 배를 몇 개 따 주었다. 와띠와 나는 한두 입 베어 먹고 옆에 있는 숲 속으로 먹던 배를 던져 버렸다. 너무 딱딱하고 당도도 없었다. 우린 계속 올라가 넓은 옥수수 밭 과 콩밭을 지나 와띠 부모님이 나무를 하고 계신 곳에 도착 했다. 이 산의 다른 곳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많았는데 도착 한 그곳엔 참나무 종류의 큰 나무들이 즐비했다. 부모님을 발견한 와띠는 내게 잠깐 주위에서 쉬고 있으라 하고는 뛰어 가 부모님을 도왔다. 와띠 아버지는 육칠 미터 되어 보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말라 있는 가지를 골라, 40센치쯤 되어 보이는 큰 칼로 내려쳐 떨구었다. 밑에 기다리고 있던 와띠 어머니는 이런 가지들을 하나하나 모아 한 묶음, 한 묶음 노끈으로 묶어 놓았다. 와띠도 다른 나무에 올라가 땔감이 될 만한 가지를 찾았다.


나무 위에는 다람쥐들이 많이 있었다. 다람쥐들이 이 나 무 저 나무를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후드득하며 다람쥐가 뛰는 소리가 나면 내 눈은 다람쥐가 어디 있는지를 찾았다.
다람쥐 구경을 하는 중에 내 뒤쪽에서 제법 큰 나뭇가지가 부러지는소리가 들렸다. 뒤편에서도 땔감을 준비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 보았다. 또 그 아이들 이었다. 이싸와 아스마였다. 거리는 멀 었지만 난 나무 위에 있는 이싸를 한눈에 알아봤다. 왠지 반 가웠다. 나는 이싸가 있는곳으로 걸어갔다.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이싸였다. 다가가자 그 아래 수풀 뒤어서 나 뭇가지를 묶고 있는 아스마도 보였다.


“얘들아 오늘도 고생하는구나.” 


중국어로 아이들에게 인 사를 했다. 나는 이싸와 아스마가 중국어를 할 수 있는지 그 때까지 아직 알지 못했다. 중국어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 기 때문이었다.
내게 반갑게 인사해 주길 바라며 난 두 아이 를 번갈아 보았다. 나무 위에 앉아서 칼로 나뭇가지를 내려 치던 이싸는 나를 보고는 불쑥 일어났다. 그 높은 나무 위 에 서 있는 어린아이 이싸를 보는 것만으로 내 오금이 져렸 다. 이싸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내가 누군지 알아보고 내 게 중국어로 “안녕하세요? 아저씨.”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러 고는 다시 나무에 앉아 마른 가지를 부지런히 내리치기 시작 했다. 이싸와 짧은 인사를 마치던 중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 이에 아스마는 이미 내게로 다가 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스마는 해맑은 웃음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며 다 가왔다. “아버지는 오늘 어떠시니?” “아버지 오늘 아침은 괜찮으세요.” 아스마는 서툰 중국어로 내게 말했다.


“아저씨 외국 사람이라면서요?” 아스마는 빤히 나를 보 며 이렇게 물었다. 누군가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아이들에게 말했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 이 아저씨는 한국 사람이야.” “한국이요?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곳이죠?” 아스마의 이런 귀 여운 질문에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너도 가고 싶니? 비행기 타고 같이 한국 갈래?” “좋아요!”


아스마는 이미 비행기를 탄 듯 기뻐했다. 아스마의 귀여 운 모습에 잠깐 내게 딸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 을 했다. “그래 아빠 회복하고 나면 아빠랑 오빠랑 같이 한 국에 가 보자.” 난 뒷감당에 대한 생
각 없이 이런 대답을 해 버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스마는 오빠에게 달려가 내가 한 말을 전했다. 이싸는 동생의 말을 듣고도 시큰둥하며 빨 리 가지를 묶어 놓으라 동생을 나무랐다. 그러는 중 이싸가 나무 아래 벗어 놓은 신발이 눈에 띄었다. 바로 휴지통에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구멍이 나 있고 때에 찌들은 신발이었다. 이싸는 나뭇가지 하나를 더 잘라 내고는 나무 에서 내려와 아스마와 함께 나무를 부러뜨려 차곡차곡 정리 하고 노끈으로 묶었다. 신발은 신지 않은 채 숙련된 손놀림 으로 일을 마쳤다. 큰 묶음 하나와 작은 묶음 하나가 준비되 었다. 이싸는 그 낡은 신발을 신고는 땔감 큰 것은 자기가, 작은 것은 아스마에게 매어 주었다. 내게 작별 인사를 한 두 아이는 땔감을 지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집으로 내려갔다. 


난 두 아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파른 경사에서 넘어질까 내 맘이 조마조마했기 때문이었다. 옥수수밭 사이로 들어가 두 아이가 사라져 버릴 때까지 아이들 을 지켜봤다.


와띠와 부모님이 땔감 준비를 마치고 우리도 집으로 돌아갔다. 와띠는 예정대로 외삼촌을 불러 나를 건너편 산으 로데려갔다. 건너편 산은 길도 잘 되어 있고, 한눈에 봐도 부부마을 산지보다는 좀더 살기 좋은 마을로 보였다. 우리는 와띠의 친구 몇 명을 만났고 우리는 어제와 같이 다시 먹고 마셨다. 그날 우리는 그곳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또 다른 와띠의 친구 집으로 갔다. 그 친구는 자수성가를 한 것 인지 동네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 고 그 친구는 아스마 나이 정도 되는 딸이 있었다. 며칠전 아빠가 새로 사 준 빨간색 드레스와 빨간 구두를 입고 자랑 스레 마당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자 이싸와 아스마의 신발이 떠올랐다.


“와띠 우리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발 살 곳에 들를 수 있 을까?”


난 와띠에게 말했다.


다음날에서야 우리는 그 산을 내려왔다. 와띠의 외삼촌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왔고 가는 길에 우리는 노강 변에 있 는 가장 큰 상점에 들러 어린이 운동화 두 개와 겉옷을 하나 샀다. 품질이 그다
지 좋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더 큰 상점은 몇 시간을 차로 가야 하는 거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오후 늦 게 우리는 와띠의 집에 도착했다.
어느덧 다음날 아침이면 곤명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며칠 간의 노강 여행은 내 중국 생활을 마무리하는 데 나쁘지 않 은 꽤 괜찮은 여행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저녁을 먹은 후 물건들을 배낭안에 정리했다. 정리를 마친 후 사 놓은 신발과 옷을 푸꽁 가족에게 전해 줘야 했다. 나와 와띠는 다시 자자 마을로 올라갔다. 자자 마을로 우리는 플래시를 비 추며 어둑한 밤길을 조심스레 올랐다. 푸꽁의 집 근처에 다 다르자 사람들이 푸꽁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푸꽁의 건강 상태가 또 심각해졌다는 것을 자연스레 감지했 고 나와 와띠는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그날 밤엔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푸꽁의 집으로 와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 문 으로 들어가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난 푸꽁의 상태를 너무 나 알고 싶었다. 나는 흐느끼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푸꽁의 침대가 보이는 구석으로 가 섰다. 푸꽁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굴은 온통 땀 범벅이었다. 정말 그날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고통으로 그의 얼굴 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울고 있던 이싸가 사람 들 가운데 소리쳤다. 왜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냐며 누군가 를 원망하는 그런 말을 했다. 아스마는 한 아주머니 품에서 울고 있었다.


모두가 흐느끼고 있는 중에 한 나이든 여자분이 손을 들 고 선창을 했다. 방안 사람들 대부분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교회의 찬송가인 듯했다. 방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침대 위 의 푸꽁을 둘러싸고 노래를 불렀다. 어떤 사람은 목이 메어, 노래를 따라 부르지도 못했다. 정말 모두들 그날이 푸꽁과의 마지막 작별의 시간이라고 확신한 듯 보였다. 노래가 끝나자 한 50대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는 푸꽁 침대로 다가가 손을모으고 기도를 했다. 고통 받는 푸꽁을 보며 난 그저 어디서 진통제, 아니 마약이라도 가져와 푸꽁에게 놓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푸꽁은 너무나 고통스러워했다. 기도 를 마치자 고통 속에 신음하던 푸꽁은 마지막 힘을 다해 뭔가를 말하려 했다. 방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방안의 모든 사람이 푸꽁
을 바라봤다. 마지막 남은 온 힘을 다해 푸꽁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스마!” 푸꽁은 사랑하는 딸을 있는 힘을 다해 불렀다. 아스마를 품에 안고 같이 울던 아주머니는 아스마를 놓아 주어 아빠에게 가게 했다. 푸꽁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베개를 깔고 비스듬히 누웠다. 아스마는 울며 천천히 침대로 올라갔다. 아스마가 올라가자 신음하던 푸꽁은 있는 힘을 다 해 아스마를 끌어 안았
다.


어린 아스마는 무서웠던 아빠의 품에서 펑펑 울었다.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 포옹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어린아이를 놓고 떠나는 아버 지의 슬픔의 눈물이고, 그간 딸에게 모질게 대했던 아버지 의 진심이 무엇이지 알게 해주는 그런 포옹이었다.
이 장면에 내 눈에 이미 눈물이 고여 버렸다.
바로 떠날 것만 같았던 푸꽁은 아스마를 놓아 주고 몇 분 후 다시 잠들었다. 얼마 후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와띠도 가져갔던 선물을 방 한구석 에 놓고 푸꽁의 집을 나왔다.


그날 밤 왜인지 모를 평온 속에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 고 그 날 밤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에서 푸꽁의 오두막 같은 작은 오두막이 가득한 큰 초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오두막 안에 푸꽁이 보였는데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 날 푸꽁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평온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한참 전에 준비한 나무 관으로 푸꽁의 장례식을 치렀다.


돌아오는 길의 노강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아픔 속에 울부짖는 듯 보였다. 마치 푸꽁 가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듯이 보였다. 돌아오는 길 와띠와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 안에서 자자 마을에 남겨진 이싸와 아스마가 잊혀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지 금세 전화를 받았고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입양을 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