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in page
  2. 재외동포 광장
  3. 재외동포문학
  4.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일곱 빛깔 무지개
작성일
2024.01.26

단편소실 우수상


일곱 빛깔 무지개

이강천(미국)


운전석 뒤에서 곰삭지 않은 똥 냄새가 풍기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할매, 똥 쌌어?”
운전석 뒷자리 가운데 앉은 로라 최 어머니가 옆에 앉은 임정애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똥냄새가 나도 그냥 넘어가던 것이 이 차 안의 불문율이 아니 었던가.


임정애 어머니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로라 최 어머니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할매, 똥 쌌냐고?”


로라 최 어머니가 다시 한번 물었다.


“하이고, 나 베 원 없이 짰어요. 징글징글해요. 시어머니가 얼마나 독하게 일을 시키는지…. 일본에서 중학교 다니다 해방돼서 나왔는데.”


“아니, 그거 말고!” 로라 최 어머니가 임정애 어머니의 레퍼토리를 갑작스럽게 끊고 말했다. “할매 옷에 똥 쌌냐고!”


“아니! 내가 왜 똥을 싸?”


임정애 어머니가 어눌하고 걸걸한 음성으로 되받았다. 이제야 로라 최 어머니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임정애 어머니는 귀가 먹지 않았다. 대화의 맥을 놓치거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적은 많았어도 말을 못 들은 적은 없었다.


“할매한테 똥 냄새가 나는데?”


“나는 똥 안 쌌어.”


“그런데 왜 할매한테서 똥 냄새가 나?”


“나는 안 쌌당께!”


뒷자리가 조용해졌다. 아무도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 냄새는 며칠 전부터 차 안을 휘저어 놓던 냄새였다. 냄새가 역겨운데 로라 최 어머니를 빼고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 나는 좀 놀랍다. 노인들의 후각 기능이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아이를 낳아서 키워 본 그녀들에게 이 냄새는 적대적인 냄새가 아니라 익숙한 냄새여서 그런 것일까? 차에 탄 사람 중에 나와 로라 최 어머니를 빼면 모두가 80세가 넘었다. 그리고 나를 뺀 열 명 모두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 본 여자들이다.

설사 냄새는 은근하고 고약하고 끈질기다. 무관심해지려고 해도 할 수 없다. 나는 차에 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행 중에 창문을 조금 내렸다. 설사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냄새는 임정애 어머니 뒤에 앉은 윤정희 어머니에게서 나는 냄새인 것 같았다.
그녀가 차에서 내릴 때 두어 번 옷자락에서 이런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제는 깜빡깜빡할 때가 많아요. 콧물이 나도 모르게 줄줄 흐르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차 안의 정적을 깬 것은 김경자 어머니였다. 김경자 어머니도 임정애 어머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늘어놓을때가 많은데 이 말은 그녀의 레퍼토리는 아니고 요즘 들어 자주 한 말이다. 그녀는 차 안에서 연세가 가장 많은 90세인데 그녀와 같은 나이에 생일이 조금 늦은 최순자 어머니가 그녀 뒤 오른편에 잠잠히 앉아 있다.


“그 정도는 괜찮아요. 나이 들면 다 조금씩 망가져요. 나는 고장 나지 않은 데가 한 군데도 없어요.”


김경자 어머니 옆에 앉은 윤정희 어머니가 조용조용 말한다. 나는 그녀가 이 말로 자신의 미안함을 은근슬쩍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심장뿐만 아니라 소화기관까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이 실수한 것이니 이해해 달라는 뜻일 것이다.


“딸은 나보고 백이십까지 살라고 해요.”


갑자기 김경자 어머니의 레퍼토리가 시작되었다.


“그럼요. 요즘은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어요.”


“지들 좋으라고 하는 거지요. 나한테는 그기 욕이지요, 욕! 그런데 지금처럼 건강하면 정말 백이십까지 살 것 같아요.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요.”


음정 하나, 토씨 하나 틀림없이 김경자 어머니가 레퍼토리를 시작한다.


“백이십까지 충분히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윤정희 어머니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건강이 가장 좋지 않은 사람에게 김경자 어머니는 하지 말아야 할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김경자 어머니는 자기의 말이 상대에게 아픔을 줄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백일 잠을 자고 난 후부터 이래요. 이상해요. 아침에는 일어나라고 옆에서 칙칙 소리가 들리고 밤에는 자라고 칙칙 소리가 들려요. 일어나면 옆에 아무도 없어요. 백일 잠을 자고 난 후에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천이백 불 받고 아들이 군대에서 백혈병으로 죽어 천이백 불 받아요. 그러니 나한테 백이십까지 살라는 거지요. 지들 좋으라고.”


김경자 어머니의 레퍼토리에 아무도 끼어들지 않는다. 추임새를 넣으면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아무도 김경자 어머니의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내가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녀의 레퍼토리를 풀어놓자면 이렇다. 위장에 문제가 생겨 식물인간으로 응급실로 보내졌는데 병원에서 포기하자고 했으나 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백일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하게 그 후론 감기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아침에는 일어나라고 칙칙 소리가 들리고 밤에는 자라고 칙칙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이
소리가 중환자실에서 들었던 기계 소리가 아닌지 내가 물어 보았더니 그녀는 상세한 것은 모르고 백일 잠을 자고 난 뒤 부터 이 소리가 귀에서 생생하게 들리는데 깨어서 보면 옆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자기 앞으로 매달 소셜 연금이 천이백불 나오고, 한국에 살 때 아들이 군대에 들어가자마자 백혈병으로 사망해 매달 천이백 불씩 나온다고 했다. 김경자 어머니가 한 번도 이 말을 다르게 말한 적이 없어 아들이 한국 군대에서 사망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백혈병으로 사망했는데 연금이 그렇게 나온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무언가 잘못 기억된 것일 수 있다.


“잘 가시오, 잉!”


최순자 어머니가 내린다. 김경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90세인 그녀의 성격은 급하고 직선적이다. 머리카락도 그녀의 성격을 닮아 곤두서 있을 때가 많다. 내가 맡은 액티비티 시간에 월요일에 윷놀이를 하는데 이길 때마다, “막걸리 한 잔도 안 주고!”하고 소리친다. 화요일에는 탁구공을 스푼으로 옆 사람에게 건네기, 종이컵을 위아래로 옮기기, 청기 백기 번갈아들기, 종이 접시 세기 등을 하는데 이때도 성격이 급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도 손을 떠는데 급하면 더 떤다.
그러다가 옆 사람이 잘못하면 소리를 꽥 지른다. 그녀 앞에 앉은 상대 팀 이 어머니는 92세인데 옆에 앉은 같은 팀 오순이 어머니가 잘못하면 꼬박꼬박,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하고 설명한다. 오순이 어머니는 84세로 테이블에서 가장 젊은데 컵 옮기기가 끝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하거나 두 손을 사용해야 하는데 한 손만 사용해 이 어머니에게 자주 지적을 받는다. 그러면 오순이 어머니는 뾰로통해져 앞만 보고 잠잠히 있는데 이 어머니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이 어머니보다 한 살 많은 93세 김 어머니가, “잔소리 좀 그만하면 좋겠어. 지는 뭐 잘하나? 왜 자꾸만 잔소리야, 잔소리는!”하고 중얼거린다. 앞이 잘 안 보이는 김 어머니가 약간 옆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꽤 크게 중얼거리는데 그 말이 보청기를 낀 92세 이 어머니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김 어머니의 말과 이 어머니의 말이 불협화음
을 이루며 계속 반복된다. 아주 오래전 음악 시간에 배웠던 불협화음의 뜻을 나는 지금에서야 분명하게 깨닫는다. 부조화를 이루는 두 음이 늘, 미치도록 똑같이, 같은 지점에서 불안하게 충돌하며 반복된다. 토씨 하나, 음정 하나 틀림없다. 대단하다.


“안녕히들 가세요.”


김경자 어머니가 차에서 내렸다. 차를 돌려 그녀의 집 앞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계속 손을 흔든다.
로라 최 어머니가 내리고 차를 돌려 윤정희 어머니의 집 마당으로 들어간다. 이 집은 뷰가 아주 좋다. 언덕 높은 곳이어서 아래 풍경이 모두 내려다보인다. 아들 집에 사는데 형편으로 보아 부족함이 없는 분이다. 그러나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다. 역시나 내릴 때 옷자락에서 설사 냄새가 진동한다.


다음으로 대만인 장 어머니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가끔 내게 대만 음식을 건네주곤 했다. 바나나 잎에 싼 닭고기 요리인데 나는 닭고기를 먹지 않아 동료에게 건넸는데 이것을 먹어 본 동료는 아주 맛있는 요리라며 감탄했다.
다음으로 임정애 어머니가 내렸다. 임정애 어머니는 80대 중반이지만 문을 열고 실내까지 인도해 드려야 하는 분이다. 임정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자식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분은 참 귀여운 분이다. “오늘 재밌었어요?”하고 물으면 항상, “예, 재밌었어요.”하고 웃으며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무엇이 제일 재미있으셨어요?”하고 물으면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눈치를 챘겠지만 이분은 약간의 치매가 있는 분이다. 약간? 약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 관점에서 본 기준일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예쁜 치매에 속한다.
어느 날 나는 그녀의 집 문을 열어 주기 위해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서 키를 꺼내다가 깜짝 놀란 적이있다. 가방 안에 얼마간의 달러와 여권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뭐예요?”


“한국에 가 볼라고요.”


“언제…. 한국 가세요?”


임정애 어머니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권을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면 곧 떠나는 것일 텐데 아침에 그녀를 태우러왔을 때 며느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여권은 집에 두고 다니셔야죠. 한국에 가실 때 가지고 가시고요. 잃어버리면 어쩌시려고 가지고 다니세요?”


“내가 한번 가 볼라고 하요. 어쩌게 사는지 한번 볼라고 하요.”


“아버님 보시러 한국에 가시려고요?”


나는 워커를 밀고 가는 그녀를 옆에서 부축해 따라가며 말했다.


“예, 내가 한 번 사는 꼴을 볼라고 하요. 어떻게 사는지.”


“언제 가시는데요?”


“내가 한번 가 볼라고 하요.”


대답이 이상해서 가방 안에 든 여권을 꺼내 보았다. 상당히 낡은 여권이었다.


“그래도 여권은 집에 두고 다니셔야지요.”


여권을 펼쳐 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여권은 20년이 훨씬 지난, 기한이 만료된 한국 여권이었다. 나는 그녀의 심중 깊은 곳에 자리한 아픔의 한 자락을 엿본 것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에서 다른 여자와 산다고 했다. 차에 탄 사람들의 말과 그녀가 자주 읊은 레퍼토리로 알게 된 사연이다.


“우리 아버지가 교민회장도 해서 집도 사 주고 했는데 고것이 뭐가 좋다고 바람이 나서 한국에 가서 사는지 모른단말이요. 못된 놈! 뭐가 부족하다고. 자식들도 다 잘 됐겠다,집 있겠다, 뭐가 부족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잘 살 텐데 고것이 복에 넘쳐서 그런단 말이오.”


몇 년 전만 해도 양로센터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중간에 내려 수영도 하고 에어로빅도 했는데 저렇게 되어 버렸다며 차에 탄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강하고 밝다. 치매에 걸리기는 했지만 성격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


임정애 어머니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중국인이나 인도인이나 국적을 막론하고 한국말로 소통하는 것이다. 다리를 다친 중국 부인을 임정애 어머니 곁에 앉힌 적이 있는데 임정애 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 유심히 들어 보았다. 그녀가 먼저 입을 뗀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줌마는 손이 참 곱소.”


중국 부인이 무어라고 중국말로 대답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중국 부인은 영어를 전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임정애 어머니도 영어를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젊어서 베를 원 없이 짰소. 시어머니가 하도 독해서 잠도 안 자고 짰는데 아줌마는 손이 참 곱소. 어째 이리 곱소?”


신호등 앞에 멈추었을 때 잠깐 돌아보니 임정애 어머니가 중국 부인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중국 부인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웃음소리만 냈다. 나중에 그녀도 임정애 어머니가 치매가 있는 줄 눈치채고 임정애 어머니의 말에 중국말로 화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손을 잡고 한국말과 중국말로 소통했다.
언어에 대해서 말하자면 흥미로운 것이 또 있다. 내가 다니는 양로센터 노인들의 국적을 분류하자면 한국인이 70%, 중국인이 20%, 인도인이 10% 정도 된다. 좀 더 세분화하면 한국인이 주류를 이루고, 네댓 명의 조선족, 7, 8명의 화교,7, 8명의 대만인, 15명 정도의 중국인이 있고, 인도인 15명 정도에 파키스탄인 한 사람이 끼어 있다. 그야말로 일곱 빛깔 무지개다.


이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내가 2차로 운행을 나가는 곳은 한인이 3명, 한인이지만 대만에서 살았던 분 한 사람, 대만인 3명, 중 국인 2명, 인도인 3명이 있다. 이곳은 미국이니 영어가 공통어이지만 모두가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다. 나와 한인 3명과 대만에서 살았던 한인과는 한국어로 소통한다. 대만에 살았던 한인과 대만인과 중국인은 중국어로 소통한다. 인도인들은 인도어와 영어로 소통한다. 그렇다면 한인과 중국계와 인도인의 소
통은 어떨까?


오순이 어머니가 차에 타며 대만인 류 어머니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몇 년 동안 함께 다녔는데도 그녀가 대만인이라는 것을 오순이 어머니는 모르고 있다. 오순이 어머니도 예쁜 치매에 속한다. 류 어머니가 한국말을 못 알아 듣자 이번에는 오순이 어머니가 영어로 인사를 하는데 영어를 전혀 못 하는 류 어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웃음으로 대신 한다. 그러자 오순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일본말을 꺼낸다.
한인과 대만인은 모두 일본말을 알고 있고 중국인은 대체로 일본어를 못한다. 일본어를 하면 손을 내젓는 대만인도 있다. 일본어를 쓰지 말자는 뜻일 텐데 약간의 치매가 있는 노인들이 그것을 알아차릴 리 없다. 한동안 일본 사람도 없는데 일본어가 차 안에 난무한다. 역사의 잔재는 쉬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가면 저 사람이 다 빼앗아 갈 텐데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1차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2차를 가기 위해 양로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김경자 어머니가 조미자 어머니, 백경숙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다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김경자 어머니?”


김경자 어머니의 얼굴이 울상으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약이 올라 죽겠어요. 전에는 저 여자도 얌전하고 안 그랬는데 왜 지금은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저렇게 안 늙어야 할 텐데….”


나는 먼저 차에서 기다리기 위해 앞서서 가고 소셜 워커가 다리가 불편한 임정애 어머니를 도와주며 걷고 그 뒤에 김경자 어머니가 따라왔다.


“어머니 알겠어요!”


임정애 어머니를 부축해서 나오던 소셜 워커가 뒤를 돌아 보며 김경자 어머니에게 말했다.


“알긴 뭘 알아요! 내가 나가면 이때다, 하고 또 빼앗아 갈텐데. 지금도 그 앞에서 지켜 주다 나왔어요. 얼마나 안쓰러운지 몰라요.”


양로센터 일과가 끝나는 마지막 시간에 빙고 게임을 해서 종이돈을 주는데 그 돈으로 월초에 화장지나 티슈 등 생활용품을 산다. 빙고에 맞지 않은 사람도 종이돈을 한 장씩 준다. 그런데 치매가 있는 조미자 어머니 돈을 그 옆에 앉은 백경숙 어머니가 빼앗아 간다는 뜻이다. 어제도 김경자 어머니 옆에 앉은 오순이 어머니를 부르러 가며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 테이블은 치매 그룹 테이블이다.


“김경자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액티비티 담당자에게 말해 놓을게요. 조미자 어머니만이 아니라 오순이 어머니도 자기 돈을 못 챙겨요.”


나는 차에 오르는 김경자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래 주겠어요? 안쓰러워 죽겠어요.”


차가 출발해서도 김경자 어머니는 그 일에서 떠나지 못한다.


“나는 옳지 않은 것은 못 봐요. 왜 남의 것을 빼앗아 가는지…. 그 여자 전에는 안 그랬어요. 점잖고 사리도 분간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변해 버렸어요. 뺏기는 여자는 치매가 심해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지켜 주었는데 내가 가기만 하면 빼앗아 가 버려요.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세상이 참 불공평하네요. 착한 사람들이 가진 것도 다빼앗기니.”


내가 말했다.


“불공평하지 않은 것이 공평한 것이에요.”


뒤에 앉은 로라 최 어머니가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씀이네요. 저는 그 뜻을 모르겠는데요.”


“세상이 그래요. 김 선생도 조금 더 살아 보면 알아요.”


무슨 뜻일까? 나는 로라 최 어머니 나이 정도가 되어 보 지 않아 모르겠다. 불공평하지 않은 것이 공평한 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 로라 최 어머니의 딸은 안과 의사이고 아들은 변호사다. 자녀들이 성공했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데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다 로라 최 어머니도 모르게 본인 방 책상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 집이 있는데도 딸네에 와서 사는데
엉치뼈가 심하게 아파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걸음을 잘 걷지못한다. 아마도 로라 최 어머니는 남편의 일과 자신의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제 자오 어머니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한국 성으로 조 씨인데 그녀는 중국 성인 자오를 사용했다. 자오 어머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운전기사 선생님은 어데서 공작하러 오십네까?”


“네?”


“말이 참 다르단 말입니다. 공작이란 말을 남한에서는 나쁜 말로 안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이 좋은 말인데 말입네다. 회사에 일하러 가는 것을 우리는 공작하러 간다고 합니다.”


“아, 네. 그렇군요. 크게 다르네요. 공작이란 말을 남쪽에서는 간첩들이 하는 일을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게 말입네다. 잘못 들으면 오해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말이 조심스럽섭네다.”


그녀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었다. 연세는 88세인데 정신도 초롱초롱하고 말에 힘이 넘치는 분이었다. 키가 작고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큰딸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아들은 한족과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작은딸은 한국인과 결혼해 미국에 살며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그녀는 연변 대학 성악 교수를 오랫동안 했는데 남편은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아들이 바이올린을 전공해
미국으로 유학을 왔고 막내딸도 피아노 전공으로 미국 유학을 왔다.


그녀의 집은 루트에서 상당히 벗어난 곳이었다. 그래서 가깝지만 아침에 가장 먼저 픽업하고 오후에는 가장 늦게 내리게 되었다.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여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멀미가 심해 멀미약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혔다.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저 앞산이 높은 산인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눈이 있는 것을 보니.”'


“네. 보통 사월까지 눈이 있지요. 삼천 미터가 넘습니다.백두산보다 높습니다.”


“고향에 가서 앞산에 눈이 많이 있는데 들판에는 꽃이 피어 있다고 하면 안 믿는단 말입니다. 나는 미국 정부 돈을 안 받습니다. 중국에서 교사를 해서 나오는 돈이 있습니다. 남편이 죽고 혼자 지내면 안 된다고 자식들이 여기로 데리고 왔는데 몇 년 됐습니다. 나는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단 말 입니다. 알았으면 벌써 다녔을 텐데 집에만 갇혀 살았단 말 입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와 격의 없이 대화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차에 타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몇 달 후 그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조선 전쟁 때 중국군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단 말입니다. 한쪽 눈을 후퇴하며 넘어져 나무에 찔렸어요. 그때부터 이래 안 보이오.”


“낙동강 전투에요?”


“다들 그때 여자도 군대를 갔단 말입니다. 열여덟 살에 언니와 함께 군대에 들어갔지요. 공연단에서 근무했단 말입니다.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고 그렇게 낙동강까지 갔다가 철수를 했단 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공군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한 사람이 당시에 적국인 미국에 와서 한국인과 어울려 지낸다? 이것에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하는가. 그녀는 북한에 관한 말은 좋다든지 싫다든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남한이 잘살게 되어 연변의 많은 사람이 남한으로 돈을 벌러 갈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여태까지 농사만 짓던 조선족이 남한으로 돈 벌러 가니 한족이 대신 들어와 농사를 짓는다고 하며 한국을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부친은 신의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연변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그녀는 사상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쟁도 그렇게 참전했을 것이다. 18 세의 어린 소녀가 무엇을 알아 사상 투쟁에 나서고 피비린내 나는 조국 해방 전쟁에 나섰겠는가?더 놀라운 말도 그녀는 했다.


“조선족으로 만든 우리 사단이 조선 전쟁이 일어나기 전 천구백사십구 년에 조선에 이미 들어갔단 말입니다. 우리 말고 다른 사단도 그랬단 말입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일반인 옷을 입고 먼저 조선으로 들어갔지요. 그래서 우리 사단이 북조선 육 사단이 됐단 말입니다.”


“그래요? 남한 사람 중에 육이오 전쟁을 남쪽에서 일으켰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오 어머니 말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증언이네요.”


“우리가 중국에서 국공 전투를 많이 해서 경험이 많았단 말입니다. 북조선 군대보다 전투 경험이 많았지요. 낙동강까지 갔다가 후퇴하는 도중에 나무에 눈을 찔려 이래 병신이 됐단 말입니다.”


이것으로 그녀의 말은 끝이었다. 운전 중에 짤막하게 이어지는 대화로는 부족해 나중에 시간을 내서 그녀의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깊은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그런데 얼마 후 내가 다른 루트를 맡게 되어 그녀와의 만남은 소원해졌다.


나는 자오 어머니의 스토리가 묻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른 루트를 운전하면서도 자오 어머니를 잊지 못했다. 새로운 루트에는 대학생 때 6.25사변을 당해 원주에서 대구까지,그리고 대구에서 부산까지 피신했던 90세의 김 아버님이 계셨다. 피난을 가며 기타와 카메라와 시계를 뇌물로 준 이야기, 어렵게 대구에 도착해 부산까지 가서 잠깐 훈련하고 낙동강 전투에 참전하게 된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 자오 어머니와 김 아버지가 낙동강 전투에서 서로 총을
쏘며 마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적으로 만난 두 분이 지금한 장소에서 운동을 같이하고 식사를 같이하며 지낸다?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두 분의 이야기를 이어 보려고 인터넷으로 자오 어머니말을 확인해 본 결과 맞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었다. 인민군6사단은 서울을 돌파한 후 호남 지역으로 기동하여 호남을 휩쓴 후 진주와 마산으로 진출하여 미 24사단 19연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단으로 낙동강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지역 전투는 낙동강 전투가 아니라 마산 전투였다.


“육 사단은 낙동강이 아니라 호남을 통과하여 진주와 마산에서 전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육 사단이 아니 거나.”


나는 자오 어머니가 사단을 잘못 기억하는가 싶어 양로센터에 나와 있는 자오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사단은 일육육 사로 북조선에 들어와 육 사단으로 편성되었단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 이십 명은 연출대로 차출 되어 낙동강까지 갔단 말입니다. 총을 쏘는 부대가 아니라 연출대였단 말입니다. 나중에 미군이 중간을 끊어 주력부대가 그것을 뚫고 우리는 북조선으로 해서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오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총을 쏘지 않았단 말입니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이것으로 전쟁에 개입했던 부담감을 떨쳐 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 후 코로나 팬데믹이 닥쳐 나는 그녀를 더는 만나지 못했다.


4월인데 비가 내리고 있다. 올해는 우기가 늦게 찾아왔고 늦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마에서 굵은 물방울이 0.3초 속도로 낙하하고 있다. 촘촘한 방충망 때문에 비는 보이지 않고 처마에서 낙하하는 물방울의 속도로 비가 내리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창밖의 풍경은 언제나 똑같다. 사막 식물들은 언제나 무표정하다. 십 년이 가고, 이십 년이 가고,삼십 년이 가도 저들은 저럴 것이다. 사막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사람이다.


가장 먼저 코로나로 사망한 분은 주현미 노래를 좋아하던 분이었다. 그분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양로센터가 문을 닫기 2주 전에 노인정으로 가며 내 차를 한 번 탔다. 그리고 양로센터가 문을 닫던 날 본인 차를 몰고 내 차 옆을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중에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그분이 나와 동향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았더라면 반갑게 고향 이야기를 나눌 수있었을 텐데….
노인 아파트에 사는 키가 작은 두 분 어머니가 함께 차를 타고 내렸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2주 사이로 코로나에 걸려 돌아가셨다. 연로하신 남성 한 분이 코로나로 돌아가시고 함께 사는 부인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세 명의 남자분이 몇 개월 사이로 세상을 떠났고 중국인 세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인도인 어머니 두 사람도 세상을 떠났다. 사망자는 평소에 비해 세 배 정도 많은 것 같았다.
그나마 코로나 백신주사를 빨리 맞을 수 있어서 이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3월부터 백신주사를 맞은 분들부터 양로센터에 나오기 시작했다. 출석 인원이 18 0명 정도이나 40명 정도가 교대로 나오는 방식으로 양로센터를 열었다. 나머지는 도시락을 배달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는데 양로센터에 나오는 분들도 많이 늙고 치매가 더욱 진행된 모습을 보였다.


다시 돌아온 김경자 어머니는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인사를 건네도 웃음으로만 인사를 받고, 나를 알아보시겠느냐고 물으면 모르겠어요, 하며 웃음으로 대신 했다. 임정애 어머니, 윤정희 어머니, 최순자 어머니, 오순이 어머니, 김 어머니, 이 어머니, 자오 어머니 등등 여러 사람이 센터에 나오지 않는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못 들었으니
집에 계시거나 죽기를 기다리는 양로병원으로 갔을 것이다. 이때쯤 일어난 중국 어머니 한 분의 사건은 나를 큰 혼란에 빠트렸다.


양 마마 집에 도착해 늘 하던 대로 문 앞 기다란 벤치 위에 점심 도시락을 놓고 벨을 두 번 누른 후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갔다. 보통 때처럼 내 차에 도착할 무렵 양 마마가 나왔는데 도시락을 보더니 다른 때와 달리 손을 내저었다. 도시락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였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양로센터로 전화를 하라는 뜻으로 귀에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댔다.


그랬더니 양 마마가 전화를 못 한다는 시늉을 했다.
내가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양 마마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문이 열려 있는 거실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양 마마가 마스크도 끼고 있지 않고 무슨 내용인지 몰라 손을 흔들고 가려는데 다시 손으로 안쪽을 계속 가리키며 무어라고 해서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가 싶어 가보니 똑바로 보이는 에어컨을 가리키며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양 마마의 옷차림은 평소와 달랐다. 상의는 속옷만 입고 있고 고개를 떨기도 했다. 나는 에어컨이 고장이 났거나 더우니 에어컨 온도를 낮추어 달라는 뜻으로 알고 신을 신은 채 거실 안으로 몇 걸음 걸어가 에어컨 스위치를 중간으로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양 마마는 또 에어컨을 가리키며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다.


말이 통하지 않고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차에 도착해 도시락을 가지고 들어가나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 마마가 네모난 중국 칼을 한손에 들고 집 앞에 있는 나무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양 마마가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나무에 가서 껍질이라도 벗기려는가 싶어서 양 마마 하고 부르려는데, 그녀가 손바닥이 앞으로 나오도록 왼손을 나무에 대더니 갑자기 커다란 중국 칼로 자신의 손목을 강하게 내려쳤다. 손목을 자르려는 듯 몇 차례 이어졌다.


나는 너무 놀라 “양 마마! 양 마마!”하고 소리치며 폴리스를 불러 달라, 911에 전화를 해달라고 주변에 소리쳤다. 그소리를 듣고 길 건너편 앞집 부부가 밖으로 나와 양 마마가 한 손에서 피를 흘리고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고 나는 설명할 경황이 없어 폴리스를 불러 달라, 911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만 소리쳤다.


나는 계속 고함을 질렀고 이때쯤 아파트 2층에서 젊은 부부가 밖으로 나와 내려다보았고 그들에게도 나는 폴리스를 불러 달라, 911에 전화를 해 달라 소리쳤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양 마마의 손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겁에 질려 칼을 들고 있는 양 마마 곁으로 다가갈수 없었다. 양 마마가 내려뜨린 왼손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중국 칼을 든 오른손은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프다는 비명도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입을 앙다물고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양 마마가 잔디밭에 앉았다. 그러더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잔디밭에 누웠다.
그때 2층 젊은 여자가 소리쳤다.


“지혈을 시켜라!”


양 마마와 내가 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다 보았고 그대로 두면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사망할 것 같아 양 마마에게 다가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팔뚝을 잡고 지혈을 시켰다. 잠시 후 미니밴이 도착하고 아들이 왔다. 아들은 약국에 다녀왔다고 했다.


“네 엄마 왜 이러시냐?”


“알츠하이머, 알츠하이머.”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아들이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대답했다.


세리프가 도착했고 영어를 하지 못하는 아들은 세리프가묻자 “알츠하이머.”라고 대답하며 들고 있던 종이를 보여주었다. 양 마마의 병명이 적힌 종이 같았다.


아들이 한 손으로 양 마마의 팔목을 잡고 다른 한 손에스마트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러더니 내게 전화를 바꾸어 주었는데 동생이라고 했다.


“네 엄마가 지금 손목을 잘랐으니 빨리 와라!”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가까운 곳에 있다며 금방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해 세리프와 앰뷸런스 요원들에게 영어로 어머니에 관해 설명했다.


나는 세리프에게 현재까지 벌어진 상황을 설명했다. 세리프가 나와 함께 양 마마 집으로 가 내가 가리킨 에어컨을 바라보며 그 내용을 수첩에 적었다. 세리프에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양 마마의 상태에 대해서 잠시 말하더니 두 세리프가 의견을 나눈 후 두 대의 경찰차가 떠났다. 마지막으로 앰뷸런스가 양 마마를 태우고 떠났다.
그 일로 나는 큰 충격을 받아 다음 날 일을 쉬었다. 양마마가 칼로 손목을 세차게 내리치던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 괴로웠다. 손목을 칼로 내리치며 그녀는 고통스러워하거나 신음도 내지 않았다. 신경이 잘린 것뿐만 아니라 뼈도 잘렸을 것이다. 이럴 수도 있는가? 알츠하이머는 고통을 못 느끼게 할 수 있는가? 왜 그녀는 손목을 자르려고 했을까? 그녀는 처음에 잘사는 딸네 집에서 살았다. 그러더니 또 잘사는 주택지로 옮겨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교적 못사는 아들네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녀가 자식들과 갈등을 겪었는지, 정신적인 문제였는지, 날마다 켜져 있던 에어컨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너무 더워서였는지 나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아들과 내가 지혈시키고 있을 때 잔디밭에 누워 나를 쳐다보며 눈을 껌뻑이더니 다른 손으로 엄지를 치켜올려 보였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봄날이 가고 있다. 인간의 나약한 말로가 가슴 아프다. 석양에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일곱 빛깔 무지개를 나는 어슴푸레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