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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바다로 가는 길
작성일
2024.01.26

단편소실 가작


바다로 가는 길

박은숙(캐나다)


흥할매는 감초할매에게 이른 새벽 전화를 걸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뭔가 남겨 둬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밤새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 동트기 전인데, 창밖은 눈 빛으로 대낮보다 밝았다. 감초할매가 도착했다.

“왜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불러 대는 겨? 이 짐들은 다 뭐여?”

“미안허이. 나가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네.”

만난 지 이십 년이 넘었어도 서로 이름도 성도 모른다.
그저 남들이 감초할매라 부르길래 그녀도 흥할매라 일렀다. 감초할매는 흥할매의 이른 새벽 생뚱 맞은 호출에 궁시렁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오는 길이 얼마나 음산했는지 아남?

감초할매는 계속된 폭우와 폭설로 뿌리 채 뽑혀 나갔거나 꺾여 나간 가지들로 거리가 마치 폐허가 된 전쟁터와 같다는 둥 호들갑을 떨며 이런 날 마다 않고 불나게 달려온 생색을 냈다.

“내가 한국에 잠시 갔다 와야 쓰것는디, 돈 쪼매하고 집열쇠를 좀 맡기고 가야 할 것 같아.”

“뭐, 돈? 열쇠? 늘 갖고 댕겼잖여?”

“가지고 갔다가 잃어버릴까 염려돼서.”

“오매, 할매가 안 하던 짓을 허네?”

“글쎄, 두 말 말고, 미안하지만 맡아 줘.”

평소 남에게 부탁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흥할매가 보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퍼런 봉지를 내밀자 감초할매는 얼떨결에 비닐에 둘둘 말린 봉지를 받아 들었다.

“얼만지 세 봐야지?”

“셀만큼은 아니여, 혹시 나 없는 사이 셈할 거이 있는데,잊은 게 없나 싶어서 맡기고 감세. 늦겠어, 지금 공항으로 나서야 돼.”

“한국 아들네 가남? 다시는 안 돌아올 사람처럼 구네,참말로.”

가방을 다 들어내고 흥할매는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집 내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정부 임대 아파트는 이사를 하지 않는 한 처음 입주할 때와 다를 게 없다. 몇십 년은 된 듯 닳아서 반질거리는 카펫에 가구라고는 달랑 한 쪽 다리가 기우뚱해 신문지를 접어 중심을 세운 침대와 좁은 나무 탁자, 가운데가 움푹 꺼진 의자 하나와 오래된 티비 한 대가 놓여 있다. 탁자를 마주한 주방은 자루 떨어진 냄비가 반들반들하게 스토브에 올려 있고 선반에는 크고 작은 양념 병들이 올망졸망 차지했다. 창가에는 흰 인조 무궁화가 생뚱맞게 플라스틱 컵에 꽂혀 있었다. 처음 왔을 때 보다 의자 한 개가 줄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은 2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흥할매의 여행 짐이 집 안에 남아 있는 물건보다 더 많아 보였다. 처음 캐나다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낡은 까만 나일론 삼단 가방, 분홍 비닐 리본이 달린 돌돌이, 어깨 끈이 늘어진 배낭을 멘 흥할매가 오늘따라 더 늙어 보였다.

‘흥! 팔순 할매가 저걸 혼자 지고 메고 끌고 스카이 트레인에 버스까지 갈아타고 공항까지 간다고!’

흥할매의 봇짐을 내려다보는 순간 감초할매는 그녀와 보낸 오랜 시간이 차창 밖의 그림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공항까지 태워다 준다는 감초할매의 말에 흥할매는 극구 손사래를 쳤다. 식전 댓바람부터 굳이 밴쿠버 국제공항까지 배웅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상황이라면 모르는 이도 도와줄 수밖에 없을 일이다. 방게 만한 감초할매의 차 트렁크에 흥할매의 짐을 실어 올렸다. 생각보다 가방은 무거웠다.
이게 다 뭐지, 저 작은 집에서 다 나왔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짐의 부피와 무게였다. 괜찮다고 하면서도 흥할매는 그녀의 호의에 고마워하시며 가뿐하게 조수석에 올랐다.

“뭐가 많네?”

“많긴, 뭐이 많아. 팔고 남은 고사리랑 도토리묵 가루,블루베리, 송이버섯 말린 거, 뭐 그런 거지. 또 코스코 가서 처음 앗싸이 베리 좀 샀어. 무거운 짐에는 아랑곳없이 그녀는 귀에 걸리는 웃음으로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코스코 카드도 없이? “

“이 없으면 잇몸 인겨. 내가 영어 한 마디 못해도 버스타고, 스카이 트레인 타고 안 가는데 없는데 코스코엔 왜 못가?”

“회원 카드 없으면 입장이 안 되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검사 안 하데. 그래서 그냥 들어가도 되는 줄 알고 들어가서 아들 내외랑 손녀딸 주려고 앗싸이 베리 몇 통 골랐어.”

“어떻게 알고?”

“내가 눈썰미가 있잖아, 옆집 크리스 할매 집에서 봤거든. 탱글탱글 새까만 열매가 매달린 그림을 잘 눈여겨봤다가가서 골랐지.”

“대단혀. 영어도 모르면서.”

“계산하려고 계산대에 가니까, 뭘 달라는 눈치여. 내가 뭘 알아. 근데 가만 보니께, 우리 콘도 3층에 사는 사람인겨. 내가 못 알아듣는 줄 아니까 자기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그걸루 기계에 대고 띠릭 하더라구, 난 돈만 냈어. 그럼된 거 아녀.”

“정말 대단혀. 잘 하셨어. 담엔 나하고 같이 가.”

“바쁜데 미안해서 쓰간디.”

“괜찮아. 감초가 빠지면 되나.”

새벽부터 일어나 한국에 갈 채비로 피곤했던지 흥할매는 야아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하고 하고 흥얼거리더니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시내를 벗어나 국제공항으로 가는길이 많이 막혔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거리의 설경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지만 차들은 도로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정지된 장면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흥할매의 남편 도영감은 4년 전 같이 도토리를 주으러 나갔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치매 증세가 있어 한국에 사는 아들 집으로 옮겨갔다.

“나두 같이 가잘 줄 알았지…, 영감 혼자 갈 줄 알았어….”

회복되면 돌아올 줄 알았던 영감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흥할매는 빈집을 혼자 지키고 살고 있었다. 그녀는 코비드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영감이 떠난 후 발견된 빈 통장을 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걸 직감했다. 한국에 사는 도영감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봐도 모르는 전화번호라는 기계음만 들리고 이내 ‘뚜뚜’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흥할매는 이십 년 전 홀아비인 도영감과 재혼하고 한국서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 재혼이라야 도영감이 살던 침대 하나 누울 자리 뿐인 방에 겨우 붙은 주방과 욕실이 딸린 정부 임대 아파트에 옹색한 가재도구가 전부였으니, 그 흔한 구리 반지는 언감생심이었다. 둘째 아들만 사고로 죽지 않았어도 재혼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나이 삼십에 청상으로 키운 아들 둘이 유일한 하늘이었지. 술 먹고 누가 데려간 줄도 모르고 비명횡사한 남편이래야 기집질과 노름에 절은 망나니였어. 동대문 시장에서 새벽부터 밥 쟁반 이고 나른 푼돈조차 마음 편히 얘들 걷어 먹이는 데 써 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뺏기고 나면 살 길이 막막했어. 남편 죽고 나니 그제서 아이들이 보이데. 쌈질만 하고 밖으로만 돌던 큰 놈도 수그러들고,
학교에서 받아온 숫한 상장들도 김치 국물에 물들고 짠지에 절여 가방 밑구녕에 깔고 다니던 둘째 녀석도 얼굴에 생기가 나더만. 애비 죽고 의사가 되겠다고 죽도록 공부만 하더니 의사로 첫 출근하던 날, 사고로 죽고 말았어. 그날도 오늘처럼 폭설이 내리길래 택시 타고 가라고 한 게 그만….”

“고생 많으셨어. 이제는 좀 내려 놓고 사셔.”

“그럼, 그래서 가끔 봉사라도 댕기면서 사는 게 난 즐겁다니까. 내 손으로 해준 밥 먹고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줄 아남? 동대문에서 밥장사로 몇십 년 살았는데, 봉사한다고 나가서 한국 밥 그리운 이들한테 밥하고 뜨끈한 국 끓이는 건 일도 아니여. 밥이 하늘인디, 그 공을 하늘은 알것지.”

가끔 여기저기 지역 행사에 불려 나가 봉사하던 흥할매와 달리 감초할매는 들녘으로, 산으로 나가 돈 버는 일밖에 몰랐다. 가진 거 한 푼 없이 어디로 나가 행방불명된 남편 대신 타국에서 자식 둘 먹여 살리는 일로 허리 펼 줄 모르고 살았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흥할매는 어디든 마다 않고 자원봉사를 요청하면 돈 버는 일보다 먼저 나서는 게 감초할매는 늘 의아했다.

흥할매는 감초할매와 함께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심은 이 없이 산 비탈, 돌 틈마다 함초롬히 홀로 제비꽃이 피면 흥할매의 일손도 바빠졌다. 지천에 널린 쑥이며 냉이, 참나물을 캐 마트에 내다 팔면 손에 몇십 달러가 쥐어졌다. 세상에 그보다 더 고맙고 좋은 일이 없었다. 그중 가장 돈이 되는 것은 고사리 꺾는 일이다. 숲이 울창해 그늘진 지역의 고사리는 길이가 길고 통통해서 맛이 일품이었다. 사방에 널린 고사리는 해가 떨어져도 손을 놓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데다 삶아서 말리는 수고만 더하면 상품가치가 높아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곤 했다.

그뿐인가? 여름내 동트기 전부터 일어나 주먹밥 서너 개싸 들고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걸리는 블루베리 농장에 나가 해가 떨어지도록 블루베리를 땄다. 두 할매가 하루 따는 양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빠르고 깔끔해서 농장주들은 블루베리가 끝날 무렵이면 이듬해에 꼭 다시 와 달라는 확답을 받곤 했다. 흥할매는 한낮의 햇살도 다 돈으로 환산하고 싶었다. 손톱 밑에 짙은 보랏빛 물이 들고 해가 저물어 블루베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감각으로 훑어 내다보면 농장 주인이 그만 가라고 손짓하곤 했다. 여름 한철 블루베리 농장은 보물 창고와 같았다.

“블루베리가 효자여. 손톱만한 그 알갱이를 가볍게 쥐고 훑으면 보랏빛 보석이 손아귀에서 순순히 떨어져 양동이에 금방 차. 가끔 따라 나선 영감은 손이 느리고 영 글지 못해서 따는 건 잼뱅인디, 내가 딴 블루베리를 신바람이 나서 옮겨다 저울대로 가져가면 다른 사람들이 을마나 부러워하는디. 이 농장 돈은 저 노인들이 다 쓸어간다나.”

심술궂은 인도 여자는 틈만 나면 따 놓은 남의 바구니를 슬쩍 집어 가기도 하고 툭 건드려 쏟아 버리곤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돈은 피보다 진하다고 믿는 흥할매는 아랑곳없이 블루베리 따는 데만 전념했다. 새벽녘은 선선해서 블루베리 따는 일이 수월하지만 해가 중천이면 땀과 모기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흥할매는 시장기가 돌면 그늘에 앉아 싸 가지고 온 쑥개떡을 씹으면서도 해가 잘 들어 블루베리가 더 잘 된 곳을 기웃거리느라 쑥개떡은 어디로 넘어가는 줄도 몰랐다. 한철 블루베리 수확이 끝날 무렵이면 그 많던 농장 일꾼들의 발걸음이 뜸해져도 흥할매와 감초할매는 미로 같은 밭에 남아 마지막 블루베리를 훑어 내곤 했다. 흥할매가 돌아간 블루베리 농장은 그녀가 흘리고 간 동백 아가씨의 붉은 꽃등이 서리에 젖곤 했다.

블루베리 수확이 끝날 무렵이면 채소 농장에서 두 할매의 손길을 기다렸다. 한 여름 밭에서 나온 채소 단을 묶고 포장하는 일부터 추수가 끝난 밭일을 정리하는 일도 두 할매의 몫이었다. 배추, 무, 콩, 옥수수 외에도 사과, 배, 감, 포도, 무화과, 등 가을걷이를 하고 빈 터에 마늘을 심었다.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마늘을 심는 일은 고되긴 해도 그런 일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없어 벌이가 쏠쏠했다.

“며칠 안 보이더니 어디 댕겨 왔남? “

“아들 내외랑 낚시하러 섬에 갔다 왔제.”

“낚시?”

“낚시 따라 가서 낚시꾼들 낚싯밥 끼워 주고 잡은 고기 내장 발라 주고 매운탕 끓여 주면 솔찮게 돈도 생겨.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얼마나 좋아. 바다가 그냥 바다여, 태평양 아니여. 그 넓은 바다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린다니까. 살다 보니 돈 주고도 못할 구경 다 하고 사네. 한국에서 밥 쟁반 이고 다님서 번 짠 돈하고는 다르다니까.”

흥할매에게 캐나다는 황금 알을 낳는 어장이었다.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할머니가 세금 없이 버는 돈은 아마도 대학 졸업한 엘리트에 못지 않았다.

“건강 생각혀. 이제 일 그만하고 여행도 다니고 근사한 레스토랑도 가고.”

“일하면서 경치 좋은 곳은 다 흩고 다녀. 버스 타고 스카이 트레인 타고 통통배도 타. 시니어라 다 공짜 아녀. 뭐 하러 돈 주고 헛툴게 놀러 다녀. 돈 벌면서도 다 하는데. 한국에서 입양 온 아그들한테 봉사하는 윤선상님이랑 근사한 식당도 댕겨 봤지, 봉사한담서 철마다 멋진 공원, 캠핑, 뭐 유명한데는 다 댕겼는데, 뭘 더 바래. 팔자에 없는 호사 다 누리고 사는데.”

“그거랑 다르지.”

“일하는 게 노는 거고 노는 게 일하는 겨. 헛투로 살면 누가 날 반기겠어. 내 손이 바쁘고 젖어야 내가 거기 있는 것 같고 남들도 내가 비면 금방 그 빈 자리를 느끼는데.”

가을이 익어갈 무렵, 밤새 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가면 흥할매는 소풍 가는 어린애처럼 들떴다. 지나다니며 눈여겨 봐 둔 도토리 나무가 있는 곳을 아는 그녀는 새벽부터 도영감을 채근하여 주먹밥 서너 개와 마실 물을 배낭에 넣고 길을 나섰다. 도토리 철이 되면 천근 같던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고 빠른 지 동동 떴다. 평지에 떨어진 도토리는 인적이 드문 시간에 주워도 되지만 대부분 도토리는 비탈진 곳이거나 숲이 우거진 곳에 많다. 누군가 의아한 의심의 눈초리로 신고라도 하게 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스릴을 느끼기도 했다. 쪼그리고 앉아 도토리를 줍다 보면 허기도 잊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피와 살 같은 도토리만 보였다. 해가 산마루에 걸칠 즈음이면 가지고 간 자루와 배낭, 돌돌이 가방 가득 도토리가차였다. 그 무게보다 더한 즐거움으로 이고 지고 끌고 버스 정류장에 이르면 벌써 해를 삼킨 어둠이 발을 덮곤 했다.

“영감, 저녁은 지난번 낚시 가서 잡아온 가자미를 기름에 살살 튀겨볼라니까, 좀만 기다리셔.”

“가자미 말고 사냥해 온 그거 있잖아 왜, 사슴고기 벌겋게 얼큰하게 해 봐.”

“사슴고기는 아들네가 가져갔고 우리네는 꿩이 있지라.”

“그럼 그거라도 해 봐. 막걸리 한 잔 할랑께.”

“그라지라, 사슴 대신 꿩이 더 나을 수도 있제. 꿩 궈 먹은 자리는 재만 남는다 안 하요.”

흥할매는 들어오는 길에 베트남 식당에 들러 월남 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오자고 하고 싶어 입이 달막거렸어도 영감 눈치를 보다 말았다. 임자 밥이 비싼 식당보다 제 입에 맞는다는 말에 도영감이 얄밉다 가도 봄눈 녹듯 살살 녹긴 한다.

흥할매는 까투리 까투리~ 까투리 타령을 흥얼거리며 간혹 어깨춤에 겨워 다리를 살포시 굽혔다 펴 가며 꿩 탕을 끓인다. 집안 가득 얼큰한 꿩 탕의 냄새가 잦아들고 그녀의 어깨에 푸드득 꿩이 날아오른다. 도영감은 한 병에 15 불이나 하는 소주 대신 흥할매가 누룩으로 만든 막걸리 한 잔 걸치고는 씻지도 않고 코를 곤다. 도토리 줍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쭈그리고 종일 앉아 있어야 하거나 비탈진 산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피로감이 배로 쌓인다. 도토리 자루를 지고 이고 끌고 버스를 타고 내려 집까지 끌고 오는 대장정은 밥알의 소중함을 절로 느끼게 한다. 도토리 철이 되면 침대와 탁자가 있는 자리를 빼고는 도토리를 널어 말리느라 좁은 집은 발 디딜 틈조차 없다. 펼쳐 놓은 도토리가 다 마르면 껍질을 벗겨 물에 담가 쓰고 떫은 맛을 빼고 말려 농장에 가서 방아를 찧어 오면 봉지에 담아 팔아야 돈이 된다. 도토리 분말은 한국 사람 이면 누구나 좋아하는지라 오히려 양이 문제이지 파는 것은 문제가 없다.

흥할매는 운선생에게 전화를 돌렸다.

“윤선상님, 도토리 가루 다 됐는데, 언제 봬?”

“에구, 고생하셨어요. 오늘 뵐까요?”

“그려, 나가 도토리 팔아서 돈 좀 벌었응께, 코피 한 잔 살께. 한 봉다리에 올해는 80불 줘야는디, 선상님은 70불에 줄라요.”

“네, 그럼 제가 밥 사고, 어르신은 커피 사 주세요.”

흥할매는 한 번도 본인이 더 갔다고 생각하면 뭐라도 챙겨 주고 퉁쳐야 직성이 풀렸다. 가끔 윤선생이 안 입는 옷이 라며 건네도 손 칼국수라도 한 쟁반 밀어서 건네야 마음이 편안했다. 나이 들면서 염치도 없으면 안된다는 게 흥할매의 철칙이다. 그녀의 곳간은 재물이 모였다. 아니, 도영감의 통장은 저절로 구른 듯이 새끼를 치고 불어났다.

도토리 벌이가 끝나면 흥할매는 송이버섯을 따러 산을 탔다. 송이는 낮은 산보다는 산기슭의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가장 고된 일이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송이를 따러 나서는 날은 우산살을 벗겨 낸 지팡이를 들고 동도 트기 전 길을 나선다. 버스를 타고 서너 시간을 달려 호프너머 내를 건너 산에 오른다. 흥할매는 송이를 잘 찾는다. 휘둘러보다가 지팡이로 툭툭 눌러 보고는 쭈그리고 앉아 송이를 따고 그 옆 가지까지 샅샅이 뒤져 송이 가족인 양 모여 있는 너댓 송이를 집어 올린다. 기막힌 눈썰미가 아니면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마술 같다. 윤선생도 한 번 따라 나섰다가 송이 몇 송이 따고는 깊어 가는 가을 산의 풍광에 빠져 흥할매의 뒤 꽁무니만 따라다니다 와서 꼬박 일주일을 앓았단다.

“추석이라 용돈 좀 드리려고 하는데, 순댓국 드시러 나오실래요?”

“윤선상님요, 당치도 않소. 나가 무슨 염치로 교통비를 받아. 한국에서 얼굴도 모르는 양부모한테 입양 와서 사는 울 아그들 생각하면 내가 목이 메이요. 울 아그들 맛있는 거나 더 해 줍시다.”

“어르신! 남편이 어머니라 생각하고 챙겨 줬어요. 자식이라 생각하고 용돈 준다면 나오셔야죠!”

“나는 쌀하고 고칙가루 말고는 돈 쓸 데가 그다지 없어라. 채소는 농장에 일하러 가면 허드렛 거 주는 대로 받아먹고 사냥 따라가서 잡은 짐승 손질해 주고 얻어 온 고기 있지, 낚시 가서 얻어 온 생선 있지, 게다가 어디 봉사라고 가면 식용유, 김, 뭐 생다지 주는 거 쓰다 본께 국수나 가끔 사다 먹고 쓰는 돈이 별거 없어. 머리도 몇 가락 없어서 거울보고 나가 자른께 미용실 갈 일두 없지.”

윤선생과 만나 한국 입양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한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늘 한결같은 윤선생이 딸 같이도 느껴졌지만 말수가 적어 왠지 어려웠다.

“윤선상님, 바깥 사장님 송이 좋아하시지라? 나가 송이좀 가지고 댁으로 갈께, 오늘 집에 기셔.”


“에구, 고생해서 딴 건데, 팔아서 필요한 데 쓰세요. 저는 마트에서 조금 사다 먹으면 돼요.”

“좋은 건 다 팔고 이건 삐품이여. 맛은 별반 차이 없응께, 드셔 봐.”

윤선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흥할매는 송이버섯을 팔각 채반에 정성껏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깨끗하게 손질한 송이 버섯은 삐품이 아니라 최상급으로 안돼도 몇백 불은 됨직한 양이었다. 지난번 받은 교통비가 영 부담이 됐던 차에 이만 하면 값은 치른 것 같아 흥할매는 어깨츰이 올라갔다. 흥할매가 송이를 가져간 날은 마침 김장을 하려고 배추를 마당에 부려 놓은 날이었다.

“워메, 김장 함시로 나한테 말도 없이 어찌 다 하려고 혼자 벌렸데.”

“바쁘실까 봐, 배추 절이는 거까지는 혼자 하려고 했죠. 내일 김장하는 날이라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씻어서 건져 놓으면 시간도 절약되구요. 송이 넣고 밥 조금 안칠게요. 식사하고 가세요.”

“그냥 둬. 나는 밥이야 어디 가나 굶고 안 다니닌께.”

윤선생이 밥을 안치는 눈치길래 흥할매는 주방에서 칼부터 들고 나가 벌써 배추를 다듬기 시작했다. 아이야, 뛰지 마라. 배에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 고~갯길. 마당에는 흥할매의 노랫가락이 무화과 나무 아래 붉게 물들고 감가지를 타고 올랐다. 핵교에서 가르쳐야 돈 쓰는 짓만 가르치지, 돈 버는 거 가르치간디. 핵교 근처도 갈 생각 말라는 흥할매의 어머니 덕에 국민학교 문턱 대신 동생 업고 산으로 들로 나물
캐러 다니던 시절이 떠오르던 흥 할매. 배 고픈 거보다 핵교 문턱도 못 밟은 설움이 컸던 흥할매의 어린 날은 종종 뽕짝을 타고 흘렀다.

가을이 깊도록 산기슭을 타고 오르내리면 송이버섯 따는 일도 끝이 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오후 네 시만 돼도 어두컴컴한 밴쿠버의 겨울 우기가 와도 흥할매가 할 일은 또 있다. 성탄절에 쓸 장식을 만드는 공장은 부지깽이도 없어서 못 쓸 만큼 바쁘다. 두 한국 할매의 손놀림은 이미 알려진 터라 시즌만 되면 전화통에 불이 난다.

“만드는 수량만큼 인건비가 나가니 많이만 만들어 주세요!”

흥할매는 중국인 사장의 경쾌한 목소리만 들어도 절로 신바람이 났다. 빨리 많이 만들려는 욕심에 일하다 보면 오줌보가 터지도록 참을 때가 많다. 그러다 감초할매가 먼저 허기는 참아도 거시기는 참으면 병 된다고 소매를 잡아 끌면 못 이기는 척 화장실을 댕겨 오는 게 다반사다. 끼니 때도 놓치고 일하다 보면 중국인 사장이 플라스틱 도시락을 가져다 주곤 했다. 벌건 소시지에 양파와 부추, 계란을 넣은 볶음밥이 들어 있기도 하고 튀긴 면에 버섯 소스를 뿌린 차오미엔을 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캔맥주를 한 캔씩 건네기도 했다. 감초할매는 갈증을 참은 탓에 벌컥벌컥 숨도 거르지 않고 쭈욱 들이켰다. 흥할매는 영감 갖다 준다고 배낭에 슬쩍넣고는 겸연쩍게 웃으면 두 볼이 맥주를 마신 감초할매보다 더 볼그스름해졌다. 탕수육 같은 고기라도 들어 있는 도시락이 나오면 속이 안 좋다며 가방에 넣어 가던 흥할매를 흘겨보다 감초할매는 목이 메곤 했다. 본 영감도 아닌 영감 탱일 뭘 그리 챙겨. 저나 챙기지. 듣거나 말거나 혼잣말로 되
뇌도 그녀는 어디서 그런 흥이 나오는지 동백꽃 아가씨부터 여자의 일생 등 이미자의 노래는 꿰차고 흥얼거렸다.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왜 다들 그녀를 흥할매라고 하는지 알겠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흥이 한인지 서러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흥할매의 일년 걷이가 거의 끝나면 가끔 어린애를 봐 주거나 청소 일을 하러 가기도 하지만 겨울만큼은 흥할매의 농한기이다. 어쩌면 흥할매의 겨울은 변변찮게 사는 큰 아들 내외를 방문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성탄절이 지나면 흥할매는 도영감과 한국으로 나가 봄이 되어야 돌아왔다.

“잘 다녀오세요. 가시면 심심할 텐데, 재밌는 여행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오세요.”

“심심할 틈이 어디 있간디? 친구는 없어도 아들 며느리, 손녀딸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 사는 게 여행인디, 뭔 여행을 하것어라. 그랴, 선상님 잘 댕겨오겠써라. 건강 잘 챙김서 일하요. 이제 선상님이 챙기던 얘들도 다 컸응께, 몸 챙기는 거 소홀하지 마셔.”

흥할매와 도영감은 서울에 도착하면 각자 자식들 집에서 지내다 돌아올 때 공항에서 만나 들어오곤 했다. 인색한 도영감이 챙겨 주는 용돈으론 아들 집에 가야 내 놓기도 낯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꼿꼿한 성격에 뒷주머니를 차지는 않았다. 아들 집에 챙겨 가는 거라고는 도토리 가루나 블루베리 말린 거, 송이 버섯 말린 게 전부였다. 그 흔한 영양제 한 통 마음대로 사 들고 다니질 못했다. 무뚝뚝한 아들
내외와는 달리 살갑게 흥할매를 대하는 손녀딸을 보는 맛에 한국 나들이는 늘 설레었다. 환갑 넘은 나이에 재산도 없는 도영감한테 재혼이라고 떠난 흥할매가 아들 내외에게는 달 갑지 않았을 게다. 당시를 떠올리니 한숨이 터져 나왔다. 둘째 아들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업이 어려운 큰 아들에게 시장 통 밥집을 팔아서 보태 주고는 자식한테 짐이 될까 봐 정도 없는 도영감과 재혼을 하고 한국을 떠났었다.

흥할매는 도영감이 손에 쥐어 준 용돈으로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와 손녀딸에게 밥을 해 주고 집안일을 거들다 보면 겨울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들 내외가 밥이라도 먹고 들어온다는 날은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곤 했다. 떠나온 밴쿠버의 집처럼 익숙했지만 낯설었다. 동대문 운동장도 없어지고 건너편 덕수상고도 없어졌다. 그 많던 고물상과 헌 책방도 사라진 동대문은 대형 팻션몰이 들어찼다. 달라진 것은 또 있었다. 시장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던 흥할매의 밥집 자리에는 샌드위치와 음료수 가게가 생겼다. 새벽부터 일하는 사람들이 빵쪼가리나 먹고 일할 수 있나 싶다 가도 요즘은 김장도 안 하고 밥 대신 빵을 먹는 사람이 더 많다던 손녀딸의 말이 떠올랐다. 한 뭉치에 만 원하는 양말을 리어카에서 사 들고 지하철을 타러 지하철역 계단으로 내려갔다. 흥할매가량 된 노인이 추운 겨울에 계단참에 앉아 이제는 아무도 쓰지도 않는 참빗이며, 발꿈치 각질제거 하는 돌, 칼 가는 돌, 귀파개, 화투, 이태리 타올, 고무줄, 벙어리 장갑 등을 팔고 있었다. 순간 흥할매는 가슴 한켠이 아려 왔다. 내가 한국에 살았으면 저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흥할매는 그 자리를 그냥지나칠 수가 없어 몇 번을 망설이다 벙어리장갑을 오천 원주고 샀다.

“점심은 자셨니껴?”

“맞은편 아줌니가 파는 바람떡으로 허기는 메웠소. 할매는 자셨니껴?”

“동향인갑다, 어디메요 할매?”

“사는 데가 고향이지, 별거 있소.”

“하긴, 사는 데가 고향이지라.”

“바람떡 하나 드실라우?”

“그랍시다. 벙어리장갑이 참 따숩겠소.”

흥할매는 노점 할매와 바람떡 두어 개를 받아 먹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한참을 얘기하고서야 자리를 떴다. 돌아서면서 좀 전에 산 양말 뭉치를 노점상 할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건넸다.

“바람떡 하나 월매 안하는디, 워쪄나.”

“바람떡 값이 아니고 친구가 주는 선물이니 받아두소.”

“새해 복 많이 받으셔. 에구. 고마워 워쪈데.”

“새해 순대국밥 한 그릇 먹읍시다. Happy New Year!”

“영어 할매랑께, 워매 겁나 부러워잉.”

흥할매는 생전 처음 친구가 생겼다. 그뿐인가, 말로만 듣던 영어도 한 마디 내뱉지 않았나. 흥할매는 속으로 ‘야야~내 나이가 어때서’를 흥얼거리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너무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서둘러 집에 돌아오니 아들 내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손녀딸은 편의점에 아르바이트 하러 나가 새벽이나 돼야 들어올 게다. 빈집에 적막감이 맴돌았다. 큰아들이 어릴 적에 느낀 외로움과 불안감은 얼마나 컸을까? 애비도 없이 새벽부터 시장통에 밥 이고 돌아 치는 애미한테 무슨 투정 한 번 부려 봤겠으며 뜨끈한 밥 한 번 제대로 밥상 머리 앉혀서 먹여 봤나. 흥할매는 속에서부터 서러움과 쭈글스러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 만든 길이냐, 나만이 가야 할 슬픈 길이네…. 낮은 소리로 이미자의 들국화를 바람 빠진 자전거 타이어처럼 읊조리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흥할매는 미리 장을 봐다 놓은 재료를 꺼내 만두 속을 만들기 시작했다. 숙주와 당면을 삶고, 두부를 으깨어 꼭꼭 짜고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넣고 양파 껍질을 까는 동안 주책없이 자꾸만 눈물이 솟구쳤다. 계란을 탁탁 털어 넣고 만두 속을 치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에 다다랐다. 아들 내외는 왜 이리 늦는 걸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만두를 빚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안절부절못하던 찰나, 인기척소리에 놀라 창밖을 보니 술에 취한 듯한 아들이 며느리 어깨에 기대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무니, 아직 안 주무셨소.”

“니들이 아직 안 들어왔는데, 어찌 잠이 오것냐. 웬 술을 이리도 마신 겨.”

“망년회라 한 잔 걸쳤소, 어무이. 나가 능력이 없어서 어무니 못 모시고 산께 어무이가 캐나다까지 시집 안 가 버렸소. 못난 아들 용소하소.”

“야가 무슨 말이로. 애미가 자슥한테 해준 것도 없음 시렁 짐까지 되야 쓰간디.”

“구두쇠 영감이 어매 구리반지도 하나 안해줍띠까? 서울 온다고 번듯한 옷 한 벌은 아니더라도 재혼해 갈 때 입고 간옷은 안 입혀 와야지. 와 그렇게 사는교?”

“어매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고 살간디. 그런 소리 말어.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데서 낚시 댕기고 사냥 따라 댕김서 좋은 데는 다 댕겨 감시 사니깨. 여기 살면 어디 그런데 댕겨가며 살 것냐.”

“어무이요. 그 딴 소리 마소. 그 쪽 자슥들이 캐나다서도 살고 한국에서도 잘 살다면서 어무이 신발 한 켤레 안 사줍띠까?”

“나가, 새 신은 있어도 헌 거이 발이 편해서 신고 왔어야.”  

“어무이 모시려고 암만 발버둥 치고 살아도 운이 안 따라준 깨 헛발질만 하고 안 사요. 코로나 때문에 겨우 일어선 현수막 사업도 문닫고 택배 막 노동 안 하요. 뭐가 되는 게 없어야. 집 사람 무뚝뚝하다고 서운해 마소. 집사람도 어무이 못 모시고 멀리 보내서 가슴이 아파 안 그런다요. 집사람도 반찬 값이라도 벌다고 밥집 댕기문서 어무이 고생한 거 생각하고 웁디다.”

“서운키는 와. 나가 며누리한테 서운노. 고상하고 사는것만 해도 고맙지로.”

“어무이요. 용소하소. 자식 노릇 못해서 미안하구먼요.”

“어여, 피곤한데 자라. 낼 일찍 나가야 한다면서.”

아들 내외가 방으로 들어가고 흥할매는 빚다 만 만두 속을 채웠다. 꾹꾹 입다문 만두 속이, 꾹꾹 입다물다 삐져 나온 만두 속이 어찌 그리 자신을 닮았는지 모를 일이다. 아들 내외는 도영감이 아들 집으로 가 버려 흥할매가 혼자 지내는 줄 모른다. 이 참에 한국에 눌러 앉을까 싶어 한국에 나왔지만 아들 내외에게 눈치가 보여 아직 말도 못 꺼냈다. 흥할매는 새벽녘 손녀가 들어올 때까지 설음 반, 눈물 반을 섞어 꾹꾹 눌러 만두 속을 채웠다. 피곤도 하련만 맑게 웃고 들어서는 손녀 딸 손에 빨간 털신발이 들려 있었다. 흥할매가 손녀에게 주려고 노점상에게 산 벙어리 장갑과 똑같은 색이었다.

“할머니, 신어 봐. 이게 젤 안 미끄럽고 따뜻한 거래.”

“할미도 너 주려고 벙어리 장갑 샀다. 껴 봐라.”

손녀딸은 벙어리 장갑을 끼어 보고 고맙다며 볼에 제 볼을 부비대고 할머니도 어서 자라고 채근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밖은 벌써 먼동이 트고 꿈지럭꿈지럭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흥할매의 마음도 새 아침처럼 한결 가볍고 밝아졌다. 아들이 그동안 속으로만 움켜지고 있던 마음을 터놓을 수 있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걸까?

늘 이번에는 돌아가면 도영감에게 얘기해서 몇 만불이라도 얻어서 아들 내외에게 줘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염치없는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 것 같기도 했지만 도영감에게 오해라도 살까 봐 벙어리장갑 마냥 참고 기다렸다. 영감의 통장엔 적어도 몇십만 불, 아니 백만 불 이상은 족히 들어 있었을게다. 정부에서 꼬박꼬박 집세 제하고 나오는 연금도 다 쓰지 않고 모으고 살았지만 한 번도 통장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 뭐에 쓸 건지 묻지 않았다. 모았다가 양 쪽 자식들 힘들때 보태 주려나 갸름할 뿐이었다.

흥할매는 매일 아침 아들 내외를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리는 데 모든 정성을 쏟았다. 상 머리에 앉아 생선 가시도 발라 주고 밥을 다 먹을 즈음에는 구수하고 뜨끈한 누룽지로 속을 달래 일터로 내보냈다. 한두 달 사이 아들 내외의 얼굴이 뽀얗게 살아나고 웃음진 얼굴이 보기 좋았다. 손녀 딸은 여전히 밝고 명랑한 얼굴로 시도 때도 없이 와락 안기며 할머니가 돌아갈 날이 다가오는 걸 아쉬워했다.

흥할매는 귀국을 며칠 앞두고 동대문 시장 지하철역 계단참에서 만난 노점상 할매가 떠올랐다. 흥할매보고 영어 할매라고 겁나 부럽다고 한 말이 떠올라 혼자 빙그레 웃었다. 습관처럼 흥얼거리던 노래가 입밖으로 터져 나왔다. 순대국밥 한 그릇 먹자고 했으니 약속은 지키고 떠나야 했다.흥할매는 손녀딸이 사 준 새 신발을 신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올라가는 계단참은 비어 있었다.

“아지매요, 여기서 장사하던 할매 오늘 안 나왔니껴?”

“에그, 어쩌나? 그 할매 돌아가신지 달포는 됐어요. 손님도 없는데 매일 나오시더니 화장실 가다가 계단에서 굴렀어요. 119  불러서 병원에 갔는데 뇌진탕으로 하루도 못 넘기고 돌아가셨어요.”

“저런 저런. 쯔쯔. 장례식에는 가 봤나요?”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노인네라 장례식이랄 게 뭐 있나요? 그냥 시에서 화장하는 날 여기 노점상 몇 사람이 갔다왔어요. 참 쓸쓸하고 안됐어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맨날추운 돌 위에서 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팔리지도 않는 물건앞에 계셨으니, 그만큼 산 것도 기적이지요. 그 할머니는 왜찾으세요? 돈 받으실 게 있는 건 아니죠? 할머니 돌아가셨다는 말 듣고 몇 사람이 돈 받을 게 있다고 다녀갔어요. 제가 아는 할머니는 절대 남한테 돈 빌리고 사는 노인이 아니거든
요. 순 거짓말이에요. 돌아가셨다니까, 설마 숨겨 놓은 돈이라도 있나 하고 허튼 수작 부린 거죠.”

“설마, 사람이 죽었는데….”

“산 사람만큼 징그러운 짐승도 없지요.”

“할매 뜨끈한 순대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 드리려고 왔더니만, 마음이 안됐네요.”

“친구 하나 없이 살다가 외국 친구 생겼다고 좋아하셨는데, 살아 계실 때 오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죄송하지만 두 분 다 너무 안되셨네요. 어쩌죠.”

“하는 수 없죠. 그래도 우린 곧 만나지 않겠어요.”

“할머니 같이 마음이 따뜻한 분이 오래 사셔야죠.”

흥할매는 노점상 할매에게 순대국밥 한 그릇 사주지 못하고 떠나 보낸 것에 대해 후회했다. 만난 날 그 자리에게 선뜻 순대국밥 한 그릇 사 주고 왔어야 했는데.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흥할매는 노점상 할매에게 쓸데없는 기대로 실망만 안겨 준 것 같은 자책이 들어 지키지 못할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지 못내 아쉬웠다.

“어머니세요? 겨울이라 한국에 오실 줄 알았어요. 언제 돌아가세요?”

“잘 있었는가? 나는 내일 가네. 도영감님은 잘 지내시제?”

전에는 한 번도 어머니라 부르거나 안부 전화도 할 줄 모르는 도영감의 며느리가 출국 전날 전화를 해 왔다. 모를 일이다. 흥할매 모르게 한국으로 떠나기 전 자식들에게 20년 동안 모아 둔 돈을 다 빼돌리고는 소식도 끊고 살지 않았나?
예정된 귀국하는 날이다. 출근해야 하는 아들 내외와 버스 정류장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국제 공항으로 향했다.
올 때와는 달리 홀쭉해진 흥할매의 배낭에는 손녀가 선물한 따뜻한 털 신발 한 켤레가 흥할매의 시린 가슴을 채웠다.
예전 같으면 공항에서 도영감을 만나 같이 밴쿠버로 돌아가곤 했다. 공항에서 석 달 만에 만난 홍영감의 얼굴은 떠나기 전보다 뿌옇게 살이 오르고 머리에 염색을 해서 십 년은 젊어 보였었다. 자식이 좋긴 한가 보다. 새로 해 입은 양복에 빛이 번쩍이는 구두,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 도영감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밴쿠버 집에 돌아와 도영감의 가방을 풀면 가방에는 싸 보낸 도토리, 송이버섯, 나부랭이 대신 바다 내음이 실린 푸른 새 가디건과 셔츠, 남성용 화장품 등 자식들이 사 준 물건으로 가득했다. 흥할매 것은 없었다. 흥할매의 가방 속에서도 비릿한 바다 향이 나는 미역과 김, 그리고 멸치, 새우들이 미안한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줄 비엔나 소시지처럼 꾸역꾸역 나왔다. 도영감이 좋아하는 얼린 순대와 찐빵이 얼굴을 내미는 사이 큼큼한 냄새를 타고 오징 어젓, 멸치젓, 명란 창란젓이 끊임없이 나왔다. 흥할매의 가방에서 나온 물건을 보고 도영감은 한동안 돈 들어 갈 일 없다며 흐믓해했다. 가족이라는 한 끈을 잡은 이상,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흥할매의 통한이 담긴 삼시 세끼 찬이었다. 별을 키우면 달이 보이고 달을 키우면 별이 보여. 정신을 차려 보니 누군가 몰래 외진 곳에 양심 내려 놓고 버리고간 개처럼 혼자 우두커니 남아 있었다. 20년 동안 전처가 남기고 간 자식에 손주 뒷바라지로 농장으로 산비탈로 흥할매의 손은 쉴 새 이 바빴지만 그들에게 흥할매는 타인보다 멀었다.

혼자 국제 공항에서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이 가을걷이 끝내고 곱게 비질한 마당처럼 쓸쓸했다. 뒤에서 누군가 할매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잘못 들었을 거라 믿으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예전과는 달리 초췌하고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 몰골로 흥할매를 보고 반기는 도영감이 보였다.

“할매, 염치없지만 같이 가고 잡아 나왔네, 그려….”

흥할매는 심장이 퉁 떨어질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벌써 보낼 옷가지 보퉁이도 부치고 탑승만 하면 될 찰나였다. 흥 할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산비탈길을 오르내리며 주운 도토리 자리가 와르르 쏟아지는 착시 현상과 땀과 모기 범벅인 블루베리 농장에서 본 해질녘 노을이 요동치는 가슴을 뚫고
머리를 스쳤다.

“뱅기는 뭐땀시 탄다요. 그냥 갯내 나는 바다로 괘기들 밥이나 주러 갑시다.” 순순히 흥할매를 따르는 도영감의 바지 가랑이 사이로 흥할매의 참아 낸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