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in page
  2. 재외동포 광장
  3. 재외동포문학
  4.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강물 속의 반지
작성일
2024.01.25

단편소실 가작


강물 속의 반지

심재훈(미국)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조 장로는 머리맡에 둔 전화기를 들어 정지 버튼을 누르고 길게 하품을 했다. 이번엔 아내의 전화기 알람이 울렸다. 혹시 몰라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두 사람의 전화기에 알람을 맞추어 놓았다.

오늘은 새벽 비행기로 안 목사 부부와 정 장로 부부, 한 집사 부부와 함께 네 부부가 수년간 별러 온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떠나는 날이다. 아내 현숙은 여행사에서 알려 준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과 이스라엘의 날씨를 고려해 현지 기온에 맞게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점퍼와 두툼한 여벌의 옷까지 준비해서 커다란 여행용 가방 2개에 가득 채웠다. 미국에서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남편은 아직도 양식에 익숙하지 못해
삼시 세끼 모두를 밥으로 해결한다. 그런 식습관은 장거리 여행 시 본인은 물론이고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불편을 주었다. 더군다나 당뇨가 심해 음식물을 조절해야 하고 당 수치를 낮추기 위해 복용하는 약과 주사기와 혈당계등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10박 11일 동안 먹을 밑반찬과 현숙 자신의 혈압약과 매일 먹는 비타민과 영양제까지 챙겨서 조금 작은 가방에 가득 담
았다. 체크리스트에서 하이라이트 펜으로 색을 칠해 가며 하나하나 확인하여 남편과 현숙이 메고 갈 배낭까지 4개의 짐을 현관 입구에 내려 놓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현숙도 아침 6시 반까지 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4시로 세팅해 놓은 알람이 울리자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입고 갈 옷을 골라서 침대 위에 걸쳐 놓은 채 보석함에서 귀걸이와 목걸이를 꺼내고 반지를 찾는데 분명히 있어야 할 반지가 없다. 2년 전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남편이사 준 2캐럿짜리 다이아 반지가 사라진 것이다.

침실 화장대 문갑이며 아래층 싱크대 서랍과 목욕탕의 비누통, 남편의 서재 서랍 등 반지가 있을 만한 곳을 모두 찾아봐도 없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사는 아들 상철은 공항까지 배웅을 하기 위해 이미 도착해서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차고 옆에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조 장로는 평소의 깔끔한 그의 성격대로 카키색 면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옅은 하늘색 아웃도어 점퍼를 입었다. 챙이 그리 크지 않은 중절모를 쓰고 허리춤에 여권 등을 담은 가죽 가방을 차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관광객 차림이다. 한 손에 본인이 메고 갈 작은 배낭을 들고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현숙이 2층에서 내려오기를 상당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다.

“아, 시간 없는데 뭘 꾸물거려!”

현관 앞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서 있는 괘종시계를 흘끗 쳐다보니 시곗바늘은 어느새 5시를 넘어가고 있다.집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며 현숙이 있는 2층을 향해 불편한 목소리로 현숙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교회를 갈 때나 외출을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라도 재촉하지 않으면 엿가락 늘어지듯 아내의 행동이 한없이 늘어진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조 장로는 버릇처럼 현관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언제나 약속시간에 5분 늦는 조 장로를 친구들이 조 장로가 아니라 오 장로라고 부르는 것도 순전히 아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문 앞에 서서 아내에게 부담을 줌으로써 굼뜬 아내의 행동을 재촉해야만 겨우 약속시간 가까이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금방 내려가요.”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침대 위에 걸쳐 놓은 옷가지를 얼른 손에 들고 아래층을 향해 큰 소리로 대답한다고 했지만 입에서만 맴도는 것이 본인 스스로 느껴졌다.

현숙은 남편의 짜증 섞인 재촉에 더욱 조급해져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마음과 생각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등줄기로부터 얼굴 위로 솟아올랐다. 남편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향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잠시 생각을 모아 마지막으로 반지를 꼈던 때를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기억이 없다.

다시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뭐 하는 거야! 빨리 나오지 못하고!”

조 장로가 발등과 무릎을 세워서 문을 괴고 있던 발을 풀자 문이 ‘꽝’ 하고 닫혔고, 현관 안까지 들어와서 2층으로 올라갈 기세로 층계 난간을 붙잡은 채, 좀 전의 말보다 두배 이상 톤을 높여서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

역시 부드럽게 대답은 했지만 머리끝에서 솟아난 땀이 이마와 귓불을 타고 화장한 얼굴로 흘러내렸다.

“허어, 참. 비행기 놓치겠구먼….”

재촉하는 것을 포기한 듯 혼잣말처럼 하고 뚜벅뚜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조 장로는 아들이 시동을 걸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 차의
조수석에 올랐다.

“누구의 소행일까?”

현숙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난간을 붙잡고 겨우 아래층에 내려왔다. 현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을 보니 얼굴에 땀이 범벅이다.
새벽부터 곱게 화장한 얼굴에 파운데이션 자국이 땀이 흐른 모양대로 골을 만들며 얼굴 아래로 번져 가고 있다.

흐르는 땀을 닦으려 현관 옆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지를 찾았다. 가늘게 감겨져 있던 화장지는 두세 바퀴 돌고는 누런 끝을 내보였다.

“아니, 다음 사람을 위해 화장지를 바꿔 둬야지! 어유, 배려 없는 인간.”

남편을 향해 혼잣말처럼 내뱉고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키친타올을 손에 걸리는 대로 뜯어서 땀을 닦았다.

남자들은 여자가 챙겨 준 옷만 걸치고 나서면 되지만 여자들이야 이것저것 챙길 것도 많고 확인해야 할 것도 많은데 조금 기다리는 것도 못하는 남편이 원망스럽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발걸음은 자동차 쪽으로 움직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온통 반지의 행방에 꽂혀 있다.

운전석에 아들이 앉아 있고 남편은 조수석에서 팔짱을 낀 채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조 장로의 입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다. 몹시 불편한 상태일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현숙은 뒷좌석 왼쪽 문을 열고 오르려다 말고 자동차 문을 열어 놓은 채 급히 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일주일 전에 골프를 치던 날 장갑을 끼는데 걸리적거려서 반지를 골프 가방 주머니에 빼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갑작스레 차고를 향해 뛰어가는 현숙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던 남편이 한심하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차고 문을 열고 급하게 골프 가방의 주머니를 홀라당 까뒤집었다. 나무 티와 볼마커, 낡고 오래 써서 골프채와 맞닿는 손바닥 쪽에 구멍이 난 장갑뿐, 역시 반지는 없다. 골프 가방에서 튀어나온 색색의 골프공이 차고 바닥을 타고 현숙의 마음처럼 이리저리로 정신없이 굴러간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골프를 친 날은 이번 주가 아니라 지난주였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 그냥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졌다.
성지순례고 뭐고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전부터 계획된 여행이고, 여러 명이 함께하는 일을 개인의 문제로 여행 전체를 망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잡고 차에 올랐다.

“아까부터 왜 그래? 당신 뭐 잃어버렸어?”

남편은 다그쳤지만 크게 궁금하지는 않은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줄지어 늘어선 집들 사이에 놓인 여러 개의 과속 방지턱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넘어가는 바람에 현숙은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머리가 천장에 부딪치며 몸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차를 조심해서 몰아야지!”

애꿎은 아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상철이 백미러로 뒤를 힐끔 쳐다보며 현숙과 눈이 마주쳤고 상철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괜한 짜증을 아들에게 퍼붓던 현숙은 순간적으로 혹시 아들놈이 반지를 가지고 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상철은 핸드폰에서 눈을 돌려 밖을 내다본다. 상가 주차장에는 더 이상 주차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차들이 꽉 차 있다. 하지만 정작 카센터에는 아침 일찍 오일체인지 손님 한명만 오고, 오후 2시인 지금까지 손님이 없어 책상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주식 시세표만 바라보고 있다. 책상 위엔 미납된 전기 요금 청구서와 전화 요금 청구서에 외상으로 가져다 쓴 부품 대금 청구서가 마지막을 알리는 경고문과 함께 쌓여 있다. 건물주에게서도 이번 주말까지 밀린 월세를 내지 못하면 코트에서 만나자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며칠 전 아버지 조 장로를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달라는 간청을 하였지만 상철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TV 속에 사자 무리와 하이에나 무리가 먹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동물의 왕국에 눈을 고정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온 상철은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다가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상철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과 어울려 마약을 하고 갱단에 들어가서 몰려다니며 나쁜 짓을 하다 경찰에 수배를 받는 등 부모의 속을 많이 썩이기도 했다. 서른이 가까워진 나이에 정신을 차려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결혼도했다. 연애로 만난 아내와 잘 사는 듯하더니 작년 연말에 이혼을 했다.

아버지가 차려 준 카센터는 경험 부족에 실력 부족으로 한 번 왔던 손님도 재방문을 꺼렸다. 계속해서 적자 운영을 하고 있고 악순환의 고리는 상철을 사업보다는 주식 투자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사업이 점점 힘들어 지자 현숙이 남편 모르게 친구들에게 빚을 내어 여러 번 도와주기도 했고, 여러 번 조 장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껏 결과가 좋지 않아 조 장로의 신뢰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

몇 년 전에도 집 안에 놔 둔 현금 만 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어쩌면 상철의 소행일 것이라는 의구심을 아직도 떨치지 못하고 있던 현숙이다.

활주로를 이륙한 비행기는 정상 고도를 잡고 구름 위로 중력을 받아서 눈 위를 미끄러지듯 별다른 요동 없이 편안하게 날아가고 있다. 창가에 앉은 남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잠을 청하는지 숨소리가 고정되어 있다. 앞 좌석 창가 쪽에 앉은 사모님은 한껏 부풀어 그녀만의 ‘어머, 어머’를 연발하며 목사님과 창밖을 내다보며 환호하고 있다. 현숙은 온통 반지 생각에 빠져서 지난 주일 날 이후의 행적을 차례차례 반추하며 기억의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용의점을 두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러면 안 된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은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은 단순한 하나의 면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보는 방향과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양이 되는 입체이고 프리즘의 색처럼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색깔이 달리 보이는 현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의심은 그녀의 머리에 문어 다리 빨판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

두 번째 용의자는 친동생 은숙이다.

은숙은 세탁소에서 바느질을 한다. 세 자매 중 막내인 은숙은 가장 이쁘고 똑똑해서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고 성장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뉴욕지사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뉴저지에서 살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은숙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세탁물을 맡기고 찾으러 오는 손님들이 쓰고 온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이 대리석 바닥을 적시고 그 위에 발자국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사방으로 희미하게 나타나서 은숙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비는 눈물처럼 어둠이 물든 창가 유리창에 붙어 슬픔이 되어 흘러내렸다. 슬픔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슬픔이 슬그머니 손님처럼 찾아와 자신의 슬픔이 되어 내 삶과 마주하게 된다
토요일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주말 내내 내렸다.

은숙은 오래 잠을 자고 일어나 창밖을 보다 다시 잠이 들었다. 요란한 소리에 일어나 아래층에 내려오니 거실 베란다
끝에서 휠체어에 앉은 민석이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덕 위 숲속 너머로 선명한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짧은 간격을 두고 천둥이 쳤고 뒤이어 다시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예정된 5년의 주재원 근무 기간을 마치고 귀국을 얼마 앞두고 있던 즈음에 한국에서 회장 사모님이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 지사장이던 민석은 호텔을 예약하고 여행코스를 정하고 일정 내내 운전에서부터 가이드의 역할까지 했다. 부하 직원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회장 사모님에 대한 부담감에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고 조금 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오고 있었다. 비가 내려서 도로가 미끄러워 핸들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2차선 도로의 오르막 커브길이어서 속도를 줄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시야를 확보하고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반대편 내리막을 내려오던 컨테이너 차량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더니 중앙분리대를 넘어 민석 일행의 차를 덮쳐 버렸다. 그 사고로 일행 중 한 명이 사망하고 회장 사모님은 중상을 입고 민석도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그일은 민석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퇴원 후 민석의 가족은 평생 장애자로 살아가기에는 한국보다 미국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쩌면 유불리를 떠나서 그런 여건보다는 주위에서 보내오는 동정의 시선을 감당하기가 죽음보다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받아들일 수 없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에 정착하기로 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이민자로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결국 경제적 책임을 은숙이 떠맡게 되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탈없이 잘 성장해 주었다. 민석은 갑작스레 닥친 자신의 불구를 인정치 못하는 듯 한동안 문밖 출입을 거부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은숙은 어차피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에게 떠안긴 삶이라면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자신이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고 인정하며 자신의 삶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여자 혼자서 네 식구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남편의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살아왔지만 외부 활동을 기피하던 민석은 주식 투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다행히 만족스럽진 않아도 제법 수익을 올리며 생활의 안정을 찾아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몇 년 전 금융 위기가 닥치며 가지고 있던 주식 자산을 한꺼번에 날려 버리고 말았다. 빈털털이가 되었다. 민석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민석의 몸과 마음은 한없이 허물어져 갔다.

민석은 술에 취한 눈으로 펄펄 날리는 창밖을 내다본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날갯 짓의 급격한 감속으로 날개를 접고 사뿐히 착지를 한다. 가지의 흔들림과 새의 정지, 그런 정물적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새는 돌연 가지를 박차고 날아갔다. 그 바람에 소복하게 눈을 머금고 있던 가지가 흔들렸고 눈은 아래로 떨어졌다.

멍하니 앉아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몰고 온 작은 파문과 고요의 회복을 지켜보던 민석은 지금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서 엄청난 것이 무방비로 벌어졌다가 다물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민석은 새가 날아와 앉는 순간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나뭇가지가 감당해야 할 흥분과 변화를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새의 작은 고리 같은 두 발이 나무를 움켜잡는 착지로 이만큼 흔들렸고, 움켜잡았던 나무를 놓고 떠나는 순간 또 흔들리는 것이 민석의 마음에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새는날았고, 나무는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평온해졌다

나는 어떻게 날아야 하지…. 어떻게 내가 가둔 나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은숙은 언니 현숙의 도움으로 뉴저지를 떠나 언니가 살고 있는 메릴랜드로 이사를 했다.

은숙이 세탁소에서 바느질을 하며 벌어 오는 수입만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한데, 대학생인 두 아이의 학비도 마련해야 했다. 그동안 언니와 형부에게 빌린 돈도 상당하여 세탁소 일을 하며 틈틈이 현숙의 집안일을 도와주며 어렵게 살고 있다.

***

세 번째 용의자는 미경이다.
미경은 남편의 누이동생으로 현숙의 집 안방과 거실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미경의 본업은 부동산 소개업이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지옥이라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할 만큼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은 이혼녀이다. 성격이 활발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은 밝은 얼굴의 소유자이지만 동물의 왕국에서 치타가 잡아 놓은 먹이를 가로채려는 하이에나의 행동처럼 돈이 되는 일이라면 서슴
지 않고 적극적으로 달려든다. 현숙이 알기로는 고정적 수입이 없고 확실한 수입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음에도 값비싼 차를 몰고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다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서 빛 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몇 주전에도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살던 시골 땅을 두고 자기 몫을 미리 계산해 달라고 요청해서 오빠인 남편과 한바탕 입씨름을 한 적도 있었다.

***

사실, 현숙이 귀중품을 잃어버린 일이 벌써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작년 가을 남편과 여행사를 통해서 6박 7일 서부여행을 다녀올 때다. 여행 두 번째 날에 라스베가스를 관광하던 중에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목걸이를 빼서 욕실 작은 타월에 싸서 거울 받침대에 올려 놓고 샤워를 마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다른 팀보다 조금 일찍 출발해야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가이드의 재촉에 급하게 호텔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그랜드캐니언의 호텔에 도착해서야 목걸이를 놓고 온 기억이 났다. 급하게 호텔로 전화를 해서 상황 설명을 하였으나 오전의 근무조가 퇴근을 해서 확인이 불가능하며 내일 다시 연락하면 확인해 주겠다는 사무적이고 원론적인 답변에 포기를 해 버린 경험이 있었다.

또 한 번은 몇 년 전 교회에서 부활절 행사와 더불어 지방회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행사음식을 준비하면서 진주 반지를 빼서 주방 선반에 놓고 저녁 늦게까지 교회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생각이 나서 급하게 교회로 달려갔지만 그날은 외부에서 많은 손님들이 다녀가는 바람에 누군가에 의해 없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빨리 포기를 한적도 있었다. 다행히 다음 주일 날 성가대 연습을 하다가 피아노 건반 위에 떨어진 반지를 반주자가 발견하여 찾은 적도 있었다.

현숙의 마음속 용의 선상에 올라간 사람은 한 사람이 더 있지만 그 사람을 네 번째 용의자로 둔다는 것이 왠지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용의 선상에서 억지로 빼기로 했다.

현숙은 갑자기 열무김치를 다듬던 날의 상황이 생각났다. 주일 날 교회 예배를 마치고 한인마트에 들러 장을 보다 싱싱한 열무단을 발견하고 열무김치를 담가야겠다는 마음과 귀찮다는 두 개의 마음으로 갈등하며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어머, 어머. 조 권사님 장보러 오셨네.”

과일 코너 쪽에서 검정색 정장에 레이스가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교회에서 보던 차림 그대로 사모님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반색했다.

“네, 사모님. 어! 목사님도 함께 오셨네.”

두 걸음 뒤쪽의 목사님 역시 양복에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카트에 두 팔을 약간 얹은 채 어색하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어머, 열무단이 너무 좋다. 열무김치 담그면 맛있겠다.그렇지 않아도 요즘 목사님이 입맛이 없다고 하시는데, 나도 열무김치나 담글까?”

말의 첫마디에 ‘어머’를 붙이는 사모의 말버릇은 이상하게도 기도할 때만 빼고 언제나 시작음으로 나온다.

“그럼, 사모님, 제가 담가서 드릴게요.”

“어머, 아니에요. 권사님.”

“사모님, 걱정 마세요. 제가 담그는 김에 좀 더 담그면 돼요.”

“어머,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사모님. 저 혼자 해도 돼요.”

“어머, 그건 안 되지. 오늘 오후 아무 일 없으니까 권사님 집에서 내가 열무 다듬고 씻는 것 도와드릴게요.”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아예 저희 집에서 저녁도 드시고 가세요.”

“어머, 괜찮아요. 장로님 쉬셔야 할 텐데….”

“아, 아닙니다. 쉬기는요. 목사님이 피곤하셔서 그렇지요.”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대구나 사다가 매운탕 끓여서 먹지요.”

그리하여 장을 본 다음 현숙의 집으로 가서 열무를 다듬으며 다음 주에 떠날 성지순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밤이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회상이 거기까지 현숙의 머리를 스치자 현숙은 생각했다.
‘그때 열무를 다듬다가 반지를 빼서 식탁 위에 놨었는데…. 그럼 열무 다듬은 쓰레기와 함께 신문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을 수도 있겠네….’

갑자기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가 궁금해졌다.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날이 매주 수요일인가 목요일인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옆자리에서 의자를 뒤로 젖힌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여보, 여보. 오늘이 무슨 요일이에요?”

“수요일이잖 아.”

남편은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웠다는 듯 퉁명하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오늘이 수요일.’

현숙은 급히 입고 있던 등산 점퍼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전화기의 버튼을 찾았지만 비행 중이라 통화가 되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니까 아직은 쓰레기를 수거해 가지 않았으면 아들에게 연락해서 찾아보라 하면 될 터였다. 지나가던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뉴왁 공항 도착 예정 시간이 10시 10 분이라고 한다. 어쩌면 쓰레기 차가오기 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시속 700마일로 날아
가는 비행기 속도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뉴왁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급하게 아들 상철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연결음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망할 놈의 자식.”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은숙에게 전화를 하여 빨리 집으로 가서 쓰레기통을 버리지 말고 차고 안에 넣어 두라는 말로 당부를 하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이미 수거를 해 갔으면 어떡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가는 비행기 탑승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지만 은숙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은숙이 근무하는 세탁소에서 현숙의 집까지는 한 시간 거리다.
일단 비행기에 탑승해서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한 다음 통화하기로 마음먹고 비행기에 올랐다.

***

텔아비브 공항에서 급하게 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숙이 상철과 통화를 했는데 쓰레기는 이미 지난 주 수요일에 수거를 해 갔고 오늘 아침에도 일찍 수거차가 수거를 마친 상태라고 한다. 실낱같은 기대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성지순례 첫날부터 안절부절못하는 현숙의 모습에 일행들도 마음을 못 잡고 갈팡질팡하면서 여행 분위기는 엉망이되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결국 조 장로가 나서서 열무김치를 담그다가 반지를 잃어버리게 된 정황을 일행에게 설명하고, 아내에게 더 이상 반지 문제로 일행에게 불편을
주어 분위기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했다.사모님에게도 오해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곁들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 장로가 사정을 설명하고 아내에게 입단속을 시킨 후성지순례 여행은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안영도 목사는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는 차 안에서 깊은 묵상에 잠겼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목회하면서 벼르고 벼르던 순례길이다. 말씀을 준비하면서나 기도를 할 때도 항상 가슴속에 공허한 영혼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땅이 있고, 어떤 나무가 자라고, 어떻게 생긴 달이 떠오를까?

예수께서 나고 자란 동네의 골목길과 갈릴리 호숫가, 바위와 모래로 뒤덮여 황량한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광야, 다 가올 죽음을 향해 그 광야 위를 걸어간 예수의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포개 보고 싶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남쪽으로 8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그리 멀지 않았다.차창으로 바라본 풍경은 안 목사가 평소 마음속으로 그리던 세상과는 달랐다. 베들레헴에 들어가려면 이스라엘 검문소
를 통과해야 했다.

실탄이 가득 든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과 장갑차가 검문소를 지키고 있다.

저 군인의 모습이 어쩌면 2,000년 전 이 지역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의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생긴 눈과 코, 저 색깔의 머리칼, 저런 피부를 가졌을 거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을 외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의 외침이 아닌 분쟁과 갈등으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검문소 이쪽과 저쪽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럽을 연상케 하는 예루살렘의 깔끔한 모습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지역은 비포장 도로에 80년대 우리나라 정착촌 같은 모습이다. 차장 밖으로 날리는 흙 먼지 사이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저 모습이 예수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여행에서 돌아왔다. 조 장로는 성지순례에서 돌아오자 마자 아내인 현숙에게 더 이상 반지에 대해서 생각도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더 이상 잃어버린 반지로 인해서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서 인간관계 마저 잃어버릴 수 있음을 상기하며 내일이라도 똑같은 걸로 새로 사 주겠다고 했다.

***

어젯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안 목사 부부는 늦게까지 잠을 자고 10시쯤 되어서야 일어났다. 10박 11일의 여행기간 동안 주로 양식만 먹다 보니 김치나 고추장 같은 자극적인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 냉장고에 있던 음식을 모두 비웠기에 오후에 장을 보기로 하고 지난번 조 장로 집에서 담가 온 열무김치를 넣고 고추장에 비벼서 이른 점심으로 먹기로 했다.

사모가 열무 비빔밥을 양푼에 비벼서 밥그릇에 옮겨 담는데, 어슴푸레 찰그랑 하고 금속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섬뜩한 섬광이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숟가락으로 뭉쳐져 있는 열무김치를 조심스레 훑어 보니 밥풀과 함께 열 무김치에 엉겨 붙은 다이아 반지가 나왔다.

“어머! 이게 웬일이야! 어머, 어머! 목사님, 이리 와 봐요.
김치에서 반지가 나왔어요. 조 권사님이 잃어버렸다던 그 다이아 반지가 나왔어요! 어서 권사님께 전화해야겠다.”
사모는 일회용 비닐 장갑을 벗고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 잠깐 기다려 봐요!”

전화기에서 현숙의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안 목사가 강렬한 외마디 소리를 외쳤다. 사모가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남편의 표정을 바라본다.

“조금 기다려 봐. 지금 전화하면 안 돼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사모의 표정을 쳐다보며 심각하
게 무언가를 생각하던 안 목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이 반지를 찾았다고 하면 오해를 살 수가 있어요. 그러니 상황을 정리해서 천천히 연락해요.”

사모는 아직도 상황 판단이 정확히 서지를 않았다.

예루살렘 호텔에서 조 장로가 반지를 잃어버린 상황을 설명할 때 현숙이 끼어들어 열무 다듬을 때 손에서 반지를 빼서 탁자에 올려놓은 것 같다고 하며 사모님도 보시지 않으셨냐고 억지로 동의를 구했더랬다. 안 목사는 왠지 은연중에 현숙이 아내에게 의심을 품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조금은 감정이 불편해졌었다.

안 목사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김치에서 반지가 나왔다고 한다면 조 장로 부부가 사실 그대로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사모로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고민하다가 김치 속에서 반지가 나왔다는 식의 핑계를 만들어 훔쳐 간 반지를 돌려주려고 한다고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결론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생각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상대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안 목사 자신도 반지가 김치에서 나왔다는 아내의 말에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여행지 호텔에서부터 아내의 행동이 여느 때같이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약간 호들갑스럽던 아내의 행동이 지나치게 조용해져서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을 때 아내는 그냥 소화가 잘 안 돼서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안 목사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날까지 아내는 웃음기 없이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언제나 말 앞에 ‘어머’를 붙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말수가 적어졌다. 몇 년을 벼르고 별러서 온 성지순례인데 아내는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남편인 안 목사 자신도 아내의 행동에 약간의 의심이 가는데 만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김치에서 반지를 찾았다고 하면의심의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미치자 어떻게 처리를 하는 게 좋을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정말로 아내가 반지를 훔친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일부러 지어낸 상황이라면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정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다음 날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위해 강단에 올라 회중을 둘러보니 어김없이 조 장로 내외가 매일 앉는 자리에 앉아 강대상을 올려다보고 있다. 기도를 끝낸 조 권사가 주보를 읽으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손끝에서 무지갯빛 광채가 번쩍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마다 안 목사의 시선은 자꾸만 반대쪽 회중으로 쏠리며 목소리에 힘이 떨어졌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 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4절에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 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내 안의 심연’을 말씀하십니다. 거기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깊은 바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그물을 내려라’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저는 그것이 묵상이라고 생각 합니다. 어떡하면 내 안의 깊은 바다를 향해서 그물을 던질수 있을까요? 복잡한 세상에서 살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며 살게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화를 내는 것은 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로 죄가 내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은 내 몸을 거쳐서 상
대방에게 넘어갑니다. 1차적 피해자는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 입니다.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를 베풀려면 먼저 내 안에서 자비심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걸 모아서 온기와 배려와
사랑의 감정에 내가 먼저 잠긴 후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훔친 자보다 잃어버린 자와 의심하는 자의 죄가 더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시기와 욕망 그리고 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내 안의 깊은 바다에서 용서라는 천국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예배를 끝내고 성가대 연습까지 마치고 나면 오후 2시가 조금 늦은 시간이 된다. 조 장로는 안 목사에게 찾아와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집으로 초대를 했다.

조 장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안 목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지에 대해선 모른 체하라고 아내에게 여러 번 당부를 했다. 조 장로 집으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배 한 상자를 샀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러하듯이 심방을 가든 초대받은 자리로 가든 달랑 성경책만 들고 방문을 하지만 안 목사는 빈손으로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별것이 아니라도 박카스나 식혜박스라도 꼭 사 들고 간다.

일상복으로 갈아 입은 조 장로가 반갑게 맞이했다.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음식상이 있었다.

“목사님이 기도해 주시지요.”

“예, 그러지요.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무한함을 믿으며 우리들의 유한한 생각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기준, 우리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들여다보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내가 찾는 삶의 평화를 이루도록 저희에게 지혜를 내려주시고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준비한 손길에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천천히 드세요.”

현숙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사 온 광어회 접시를 안 목사 쪽으로 당겨 놓으면서 말했다.

“사모님도 많이 드세요.”

“어머, 정말 회가 싱싱하네요.”

그때였다.

“목사님, 반지를 찾았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잃어버린 사람이 죄가 크다고 나나 저 사람이나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의심을 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죄송합니다.”

조 장로가 죄인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반지를 찾았어요?”

광어회를 집어서 초고추장을 찍으려다 조 장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바람에 젓가락에 집었던 광어회가 떨어졌다. 사모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안 목사와 조 장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네, 침실 문갑에 잘 보관되어 있었는데 저 사람이 당황해서 미처 확인을 못 한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눈에 보이는 곳에 대충 둬야지 잘 둔다고 하다가 오히려 못 찾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안 목사 부부는 어김없이 새벽 예배를 위해 교회로 향했다. 새벽 안개가 헤드라이트의 빛에 따라 흐느적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안개의 입자가 자동차 유리창을 뚫고 안 목사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어떤 종류의 답답함이 안 목사의 목구멍에서 솟구쳤다. 마치 창밖의 얼룩을 창 안쪽에서 하염없이 닦아 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답답함. 그것은 어느 바람 부는 저녁
나절의 슬픔 같은 그런 막막함이었다.

새벽 예배를 마친 후 안 목사는 아내를 집에 내려놓고 혼자 차를 몰았다. 30여 분을 달려 포토맥 강 언덕 위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강줄기는 막막한 아침 안개에 묻혀 부드럽지만 장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 운동으로 달리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이 건강한 웃음을 흘리며 지나간다. 반대편 도로 위에는 이른 새벽임에도 워싱턴 DC로 출근하는 자동차의 불빛이 안개를 뚫고 희미하나마 서로의 뒷모습을 비춰 가며 물 흐르듯 움직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안 목사는 자신 안의 깊은 바다를 향해서 그물을 던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안 목사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어 힘껏 강줄기 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넘실넘실 무리를 만들어 흐르는 강물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유유히 흘러만 간다.

***

안 목사 부부가 돌아가고 조 장로는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여보…. 나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조 장로는 침대 서랍에서 반지통을 꺼내 반지를 현숙의 손에 끼워 주면서 말했다.

“잃어버린 반지…. 그거 그만 잊어버려요. 사실 그 반지 진짜 다이아가 아니었어요. 그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아서 이미 테이션을 샀고 형편이 되는 대로 진짜로 바꾸어 주려고 했는데…. 그날이 오늘이 되어 버렸네…. 미안해요.”

조 장로는 차분한 음성으로 현숙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조 장로의 말에 현숙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