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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2세 아르헨 차관보 변겨레 "언제나 한글이름으로 결재"
한인2세 아르헨 차관보 변겨레 "언제나 한글이름으로 결재"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2016 한·중남미 함께 가는 미래' 포럼에 참석 중인 한인 2세 변겨레(Antonio Kyore Beun) 아르헨티나 문화부 차관보가 30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외교부 출입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6.6.30 seephoto@yna.co.kr 유창한 한국말 구사…"손바닥 맞아가며 배워 절대 잊을 수 없어" "정치, 큰 변화 일으키는 방법…정부 투명화, 빈곤 없애고 싶어"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김효정 기자 =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얼굴이 달라서 사람들이 저를 쉽게 기억해요. 그래서 두 배로 겸손하게 하고 두 배로 더 노력합니다." 한인 2세로서 아르헨티나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 중앙정부 고위직까지 오른 변겨레(29, Antonio Kyore Beun) 아르헨티나 연방정부 문화부 차관보는 유창한 한국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외교부 주최로 열리고 있는 '2016 한·중남미 함께 가는 미래' 포럼 참석 등을 위해 지난 25일부터 방한 중인 그는 3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외교부 출입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보좌했던 이반 페트렐라 시의원이 연방정부 문화부 차관에 임명되면서 지난 1월부터 문화부 차관보에 발탁됐다. 그의 부모님은 1980년 단돈 10달러를 들로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갔고, 언제나 모국을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세 아들의 이름을 겨레, 얼(25), 결(20)로 지었다. 남동생 결은 아르헨티나 대통령궁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인 2세로 대통령 연설문 작성팀의 일원이다. 이 때문이지 그는 간담회 내내 한국에 대한 애정과 한인 2세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온 점을 강조했고,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부모님의 강인한 훈육을 소개했다. "'겨레'라는 이름이 한민족이라는 뜻이 있다고 설명하면 사람들이 더 좋아해요. 저를 현지이름인 안토니오로 아는 분은 거의 없어요." 그는 "결재를 할 때도 '변겨레'로 한다"면서 "한국계 아르헨티나인이 고위관료가 됐다는 도장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언제나 사인을 한국어로 한다"고 소개했다. 변 차관보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열심히 해야 한다는 교육을 많이 받았다"면서 "무엇을 시작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장을 봐야 하는 그런 점이 저의 장점이 된 것 같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한인2세 아르헨 차관보 변겨레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2016 한·중남미 함께 가는 미래' 포럼에 참석 중인 한인 2세 변겨레(Antonio Kyore Beun) 아르헨티나 문화부 차관보가 30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외교부 출입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6.6.30 seephoto@yna.co.kr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관료가 됐느냐고 묻는데, 저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저는 한국계 아르헨티나인이지 절대로 외국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은 저에게 '태평양 한복판에서 헬리콥터에서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그냥 해변이 보일 때까지 열심히 헤엄쳐야 하는 상황이다'라는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다"면서 "(그래서)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으로 일했던 것 같고, 문이 하나 열리고 또 하나의 문이 열리면서 차관보직까지 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12살 때부터 부모님이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시켰다면서 15세 때는 2천300㎞ 떨어진 남쪽 도시에 가서 그곳 주지사와 면담하고 오라는 미션을 준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된 배경으로 "어머니로부터 손바닥을 하도 맞아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말이 한국말"이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 태어나 한인 2세로 살면서 독일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문화변동 때문에 정체성이 약간 혼란스러울 시기가 있었다"면서 "한국 독일 아르헨티나에서 제일 좋은 점을 퓨전(융합) 시켜서 더 나은 나의 비전을 만들어야겠다는 그런 다짐으로 극복했다"고 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법대 시절, 22세에 정당 소속으로 학생회 활동과 함께 정치에 입문한 그는 "남을 도울 방법 같았다. 정치가 큰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투명화, 현대화가 제일 큰 바람"이라면서 "장기적으로 빈곤을 없애고, 돈이 있든 없든 같은 기회를 줄 수 있는 그런 정부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면서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변 차관보는 "한국과 아르헨티나 작가들이 상대국을 서로 방문해 3개월간 머물면서 경험을 쌓는 교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다음 달 1일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와 만나 협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lkw777@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6/30 19:49 송고
2016.07.01
전유미 美 LA한인회장 "주류사회에 목소리 낼 것"
1962년 한인회 출범후 3번째 여성 회장…"정치인들 두루 만나겠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한인회가 한인들끼리만 소통하면서 머물면 안 됩니다. 미국 주류사회에 정치적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야 합니다." 50만 명 규모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를 2년간 대표할 전유미(미국이름 로라 전·여·56) 한인회장의 말이다. 전 회장은 현지 시간으로 28일 제33대 회장에 취임한다. 1962년 한인회 출범 이후 3번째 여성 회장이다. 그는 취임에 앞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미국 주류사회에 한인사회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LA 카운티에 있는 LA, 롱비치, 글렌데일, 산타클라라타, 포모나, 토런스 등의 도시를 돌며 시장과 시의원을 만나고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전 세계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사는 LA의 한인회는 가장 모범적이고 제대로 된 활동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며 "고국에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는 한인회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변화의 기수, 변혁을 시도하는 자'라는 모토 아래 한인회의 개혁과 세대교체도 약속했다. 전 회장은 "고국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미국에 이민해 정착한 한인 1.5세가 50대에 진입했고, 2세들도 주류사회에 포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그러나 아직 한인회는 이들이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1.5∼2세가 한인사회 주역이 되도록 관심을 두고 투자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LA 한인회관의 관리주체인 한미동포재단 내분사태에 대한 나름의 해법도 제시했다. 매년 30만 달러에 이르는 한인회관 운영수입을 얻는 재단은 분규 상태다. 2010년부터 불투명한 회계처리, 이사회 분란, 법정소송, 공금유용 등으로 법정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 회장은 "앞선 세대가 뜻을 모아 건립한 한인회관의 건물 수익을 지금처럼 마음대로 써서는 안 되며, 2014년 7월 이사들이 전원 사퇴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LA 지역의 한인단체 간 단합과 협력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앞으로 한인 단체를 일일이 찾아가 함께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일하자고 제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전 회장는 1981년 부산중앙여고 졸업 후 미국에 이민했다. UC버클리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남가주대(USC)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루실 로이발 앨러드(민주당) 연방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한인건강정보센터(현 이웃케어 클리닉) 2대 소장을 맡아 13년간 재임했다. LA 한인회 이사(4회)와 제32대 수석부회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지난달 열린 회장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됐다. 전유미(로라 전) 로스앤젤레스 한인회장. ghwang@yna.co.kr
2016.06.29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② 양꼬치로 대박 터뜨린 서용규 씨
② 양꼬치로 대박 터뜨린 서용규 씨 직영점 6개, 가맹점 15개 '미각' 대표…직영점만 연 매출 60억원 "현지화 메뉴로 한국인 입맛 공략 성공, 3년 내 200호점 낼 것" 한중창업경영협회 회장…창업 노하우·경험 전수하며 '성공 나눔'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TV 예능프로에 출연한 배우가 "양꼬치엔 칭따오"라고 한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양꼬치 열풍이 뜨겁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동포(조선족)가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양꼬치는 초창기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안산, 수원 등 조선족 집단 거주지에서만 성행하다 지금은 어엿한 '전국구 음식'으로 부상했다. 20∼30대가 즐겨 찾는 양꼬치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조선족 기업가가 있다. 서울과 수도권 등에 6개 직영점과 15개 가맹점을 가진 '미각'의 서용규(42) 대표가 주인공이다. 24일 서울 종로 피아노 거리의 직영점에서 만난 서 대표는 '미각'의 인기 비결을 "한국인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현지화한 메뉴를 개발한 덕분"으로 돌렸다. 직영점에서만 연 매출 60억 원을 올리고 있다는 그는 "직영·가맹점 모두 매장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연 매출이 평균 7억 원 이상으로 국내 양꼬치 점 중에서 평당 매출이 제일 높다"고 자부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쑤이화(綏化)시 출신인 그는 고교 졸업 후 톈진에 있는 한국 무선호출기 회사에 취직했다. 이후 통역과 기지국 AS를 담당하며 모은 돈으로 1998년 하얼빈(哈爾濱)시에서 한식당을 개업했다. 당시 조선족의 월급이 평균 150달러인 상황에서 무려 750달러의 월급을 받는데 왜 그만두느냐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자신의 사업을 해보고 싶어 망설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고 고교 시절 식당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던 경험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얼빈체육대 앞에 식당을 차렸는데 입소문을 타면서 점심때는 손님이 줄서기도 했다. 그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경영하려니 눈코 뜰새 없이 바빴지만, 손님들의 '맛있다'는 칭찬에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한국식당에 주류를 납품하는 폭력조직이 무리한 요구를 해와 시비와 함께 싸움이 벌어지면서 더는 현지에서 식당업을 지속하기 힘들게 됐다. 신변에 위협마저 느낀 서 씨는 사업을 제대로 정리도 못 한 채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99년 말 서울에 도착했을 때 몸에 지닌 것은 달랑 여권뿐이었다. 익숙한 일에서부터 시작해보자며 중식당에 취직해 요리를 배웠다. 요리 자격증을 취득해 2001년 고덕동에 배달전문 중화요리 전문점을 차렸고, 3년 뒤에는 대치동에 홀을 갖춘 전문 요리점을 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던 2006년에 또다시 사업을 접어야 했다. 불법체류자였는데 합법체류로 신분을 바꿀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방문 취업비자(H2) 제도를 시행하면서 '불법체류자 양성을 위한 자진귀국' 제도를 내놓았다. "한국에서 사업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욕심에 비자 만기에도 남아 있었죠. 그러다 보니 가게 명의도 차명으로 해야 했고 늘 단속에 가슴 졸여야 했습니다. 자진 귀국하면 나중에 H2 비자로 재입국할 수 있다는 말에 주저 없이 보따리를 쌌습니다." 2008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사업계획을 세워 2009년 노량진에 매운 짜장·짬뽕을 주요리로 내세운 중화요리점을 냈다. 4번째 창업이라서 자신이 있었고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해보자는 의욕도 넘쳤다. 마침 매운맛이 인기를 끌기 시작할 때여서 1년 만에 월 매출 4천만 원을 넘어섰다. 가게를 더 키우려면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새로운 메뉴 개발에 몰두했다. 그때 만난 것이 양꼬치였다. "2010년 고향친구 모임을 위해 동대문에 있는 양꼬치 점에 갔는데 깜짝 놀랐죠. 월 매출이 1억 원이라는데 손님 중에 조선족이 거의 없더군요. 양고기는 한국에서는 익숙한 음식이 아니어서 중국 출신자만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거다 싶었죠." 서 대표는 양꼬치와 중화요리를 접목한 가게를 내보자며 신중히 준비했다. 승부처는 차별화라고 생각했다. 우선 생후 6개월 전후로 도축해 육질이 부드러운 호주산 양고기를 들여왔고, 특유의 냄새를 없애는 밑간에서부터 구운 후 찍어 먹는 소스 등 전부 새로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지금의 '미각'이다. 첫 점포는 조선족 거리가 아닌 고려대 앞 먹자골목에 차렸다. "한국인을 주 고객으로 잡고 중국 음식 특유의 향을 없애면서 고소함과 단맛을 내세웠죠. 한국의 젊은 층이 몰리는 곳에서 정면대결해야 크게 키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매장은 고객의 99%가 한국인입니다. 덕분에 고대 앞의 1∼2호점은 연 매출 합계 25억 원을 올리는 먹자골목의 명물이 됐습니다." 이후 종로와 판교, 안양 범계역 주변에도 직영점을 냈다. 15개 가맹점 사장은 모두 서 대표 친인척과 지인이다. 가맹비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메뉴도 무료로 전수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라고 했다. "가게를 차릴 때마다 지인들이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도 선뜻 돈을 빌려준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다는 걸 잊지 않았죠. 나만 챙기며 살자는 생각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경험에서 배웠거든요. 성공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에 자신이 붙은 그는 최근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려고 '미각 푸드'로 상호 등록을 하고 사무실과 교육장을 마련했다. 자신이 50% 비용을 냈고 가맹점을 하는 친구들 6명이 동참했다. 다음 달에는 직영점 1개와 가맹점 2개를 추가로 오픈한다. "부산 등 지방에도 가맹점을 냈는데 반응이 무척 좋습니다. 전국으로 확대해 3년 안에 200호점을 내는 게 목표입니다. 소비자 입맛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생각에 지금도 틈나는 대로 주방에 들어가 메뉴를 개발합니다." 서 대표는 지난 4월 한중창업경영협회의 2대 회장에 올랐다. 한국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조선족들이 모여 2014년에 설립한 협회는 후배들이 창업하는 데 필요한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그는 취임 첫 사업으로 9월부터 창업 예비스쿨을 열어 '성공 나눔'에 나설 계획이다. 재한조선족이 과거와 달리 한국에 정주하려는 경향이 크다고 생각하는 서 대표는 2세들이 차별받지 않고 살게 하려면 1세대가 돈을 버는 것 못지않게 한국 사회에도 기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예전과 달리 가족이 함께 들어와 사는 조선족이 늘고 있습니다. 저와 친인척도 마찬가지라서 이젠 명절이 돌아와도 외롭지 않습니다. 여기가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적응 노력과 봉사활동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주변 인식도 바뀔 겁니다." wakaru@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6.27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① 강광문 서울대 로스쿨 교수
베이징대·도쿄대서 학위받고 2011년 서울대 교수 임용된 '빈농의 아들' "조선족 3세, 한민족 DNA·중국인 기질 겸비…각계에서 눈부신 성취" "한국, 제국의 경험 없다…조선족과 공존은 다문화·글로벌국가 디딤돌" <※ 편집자 주 =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4월 말 기준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이 가운데 중국동포(조선족)는 63만 명을 헤아립니다. 귀화자 7만여 명과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7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모국을 찾아온 조선족의 숫자가 늘어나고 세대가 교체되면서 단순노무직에 머물던 이들의 직업도 학계·금융계·무역업계·문화예술계·법조계·공직자 등으로 다변화·전문화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어려운 여건과 차별적 시선을 딛고 자신의 분야에서 값진 성취를 이룬 인물을 매주 한 명씩 소개함으로써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고 다문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고자 합니다.> ▲ 서울대 법학관 연구실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한 강광문 교수. 2016.6.20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중국 베이징(北京)대 졸업, 일본 도쿄(東京)대 박사, 한국 서울대 교수. 동양 3국의 명문대를 거친 수재 중의 수재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강광문(42) 부교수의 이력을 보면 대부분 그가 줄곧 성공가도만 달려왔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질투 섞인 선망의 시선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중국 지린(吉林)성의 소도시에서 빈농의 아들로 자란 조선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가 겪었을 신산한 역경을 떠올리며 경외심을 품게 된다. 1993년 지린성 중부의 작은 도시 메이허커우(梅河口)에서는 경사가 났다. 그곳의 조선족 학생이 지린성 대입 시험에서 문과 수석을 차지한 것이다. 창춘(長春)이나 지린처럼 대도시도 아니고, 옌지(延吉)처럼 조선족이 많은 곳도 아니어서 놀라움은 더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강 교수다. 강 교수의 할아버지는 경북 안동, 할머니는 경북 영천에서 각각 만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짝을 이뤘다. 먹고살기 힘들어 지린성과 랴오닝(遼寧)성을 옮겨 다니며 번번이 새로 땅을 갈았다고 한다. 끝없는 유랑 속에 자식 8남매는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농사를 지으며 3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농번기가 끝나면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자녀의 학비를 모았다. 강 교수의 남동생도 명문 칭화(淸華)대를 나와 베이징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누나 역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다. 17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법학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겸손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이력과 조선족으로서의 한국 생활을 털어놓았다. "제가 특별히 머리가 좋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남보다 엄청나게 노력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이 좋았습니다. 주로 철학이나 역사 쪽이었죠. 지금도 남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저 공부가 좋아서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베이징대 국제정치학과에서는 한 반의 30명 중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고향의 조선족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하던 콤플렉스를 경험했고 정체성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정파(政法)대 석사과정을 다니며 변호사 자격증과 법학석사 학위를 땄다. 졸업 직전부터 1년 반가량 로펌에서 일했다.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던 중 친구가 일본 유학을 권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무대였다. 2000년 12월 도쿄대 법학정치학연구과에 외국인 연구생으로 입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환경도 다르고 말도 익숙지 않았으니까요. 변호사 시절 모은 돈을 갖고 갔는데, 당시에는 두 나라의 임금이나 물가 차이가 워낙 커 금세 바닥이 났지요.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통번역 일을 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자연히 수학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쿄대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다시 딴 데 이어 마침내 2010년 박사모를 쓸 수 있었다. 그의 전공은 헌법학. 그중에서도 헌법사와 법철학에 관심이 많다. 박사 논문은 일본과 독일의 헌법을 비교 연구한 것이다. 도쿄대에서 연구원으로 박사후과정을 보내던 중 서울대에서 제의가 왔다. 중국과 일본의 법률을 함께 강의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선배의 권유에 따라 지원서를 냈고 2011년 초 조교수로 임용됐다. 서울대에서는 2009년 임용된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나노융합학과의 박원철(45) 교수에 이어 두 번째이고 인문사회계에선 처음이다. "제가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선조의 고향이라 친근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지요. 중국과 일본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제가 한국에서 교수로 일한다면 시야가 넓어지고 기회도 많아질 것으로 기대했지요. 이번 학기에는 일본법과 헌법사상사를 강의했습니다. 보통은 한국어로 강의하고 중국법과 일본법은 각각 중국어와 일본어로 가르칩니다." 강 교수는 전형적이면서 대표적인 조선족 3세다. 1세는 일제강점기 때 건너간 조선인이고, 2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태어난 조선족 중국인이다. 3세는 문화대혁명(1966∼1969)을 겪지 않은 이른바 '70후(後)' 이후 세대로 개혁 개방의 물결과 함께 자라 이념의 틀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국제 감각도 지녔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우리나라로 쏟아져 들어온 조선족은 대부분 2세였다. 남자들은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단순 노무자로, 여자들은 식당 종업원·가사도우미·간병인 등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국내 조선족 사회에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학력 엘리트들이 늘어나 전문직에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강 교수는 그 변화의 중심에 있다.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KCN)에 관여하며 계간지 '맥(脈)'의 발행을 돕는가 하면, 2011년에는 예동근 부경대 교수 등 국내 거주 조선족 3세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족 3세들의 서울 이야기'(백산서당)를 함께 펴내기도 했다. 오는 8월에도 이들과 공동으로 (가칭)'동북아의 허브를 만나다-글로벌 조선족:경계를 넘어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모국의 동포들은 여전히 우리를 정형화된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건 대부분 2세에 의해 틀지어진 것이지요. 3세들은 이중언어와 다문화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각계에서 눈부신 성취를 거두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업이나 화장품 판매 등의 분야에서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요. 지금도 북한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조선족이 적지 않지만 남북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 조선족 3세들이 시장을 선점할 것이라고 봅니다." 강 교수는 한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먼저 배워 중국보다 앞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중국의 성장 속도가 빨라 여러 분야에서 역전 현상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특히 조선족 3세들은 한민족의 DNA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중국인 기질이 더해져 사업이나 장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조선족을 멸시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최근에는 반다문화 정서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한국은 제국의 경험이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1105년 고려가 탐라국(제주도)을 복속시킨 것 정도가 있을 뿐이지요. 일본은 지난 세기 다른 나라를 침략해 이민족을 다스려본 적이 있습니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이민족에게 공격받고 이들을 지배하며 제국을 경영해왔지요. 한국은 단일민족이란 이름 아래 균일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질적인 집단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모르고 사회 시스템의 탄력성이 약합니다." 그는 외국인 범죄가 일어날 때 집단 전체를 겨냥해 반감을 드러내거나 비난을 퍼부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범죄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집단 간의 갈등으로 번져 수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흔히 '조선족 사투리'로 연상되는 '보이스피싱'도 조선족에게만 화살을 겨눌 것이 아니라 허술한 금융 시스템을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범죄 집단을 두둔하거나 피해자들의 슬픔을 도외시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한국은 같은 핏줄인 조선족과 어울려 사는 법을 익히면서 다문화 사회로 순조롭게 이행하고 글로벌 국가로 도약해야 합니다. 한국인은 중국, 미국 등 강대국에 대한 사대의식을 지닌 적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이 한국으로 몰려오니 이들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탈북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탈북자도 포용하지 못하는데 통일 이후 어떻게 남북이 어울려 살 수 있겠습니까. 조선족은 한국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한국이 아시아의 모범 국가가 되려면 자기보다 못산다고, 생김새가 다르다고, 우리말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태도를 하루빨리 버려야 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강광문 교수는 "한국이 다문화 사회, 글로벌 국가로 나아가려면 먼저 같은 핏줄인 조선족과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충고한다. 2016.6.20 강 교수는 같은 조선족에게도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관행과 질서를 존중하고 공존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지금은 돈 벌기 바빠 여유가 없다며 시민의식을 등한시하면 여전히 주변인으로 남게 됩니다. 또 각자 실력을 키우고 어떤 일을 하든지 성실한 태도로 임해야 주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지요." 강 교수는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마다 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중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입니다. 저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다 구사하지만 일본어에는 익숙지 못합니다. 어릴 때 자라면서 익힌 모국어와 철들고 난 뒤 배운 외국어는 다르거든요. 또 양국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한 것도 큰 장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에게 '지금은 한민족이면서도 중국인인 경계인의 처지를 불우하게 여길지 모르나 나이 들어 보면 내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 heeyo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6/20 07:00 송고
2016.06.20
장영식 도쿄한국상의 신임 회장 "한일친선에 힘보탤 것"
뉴커머 출신 첫 회장 "신·구 정주자 화합과 글로벌화에 앞장서겠다"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올드커머'(구정주자)와 '뉴커머'(신정주자) 기업인이 상생하며 발전하는 상공회로 이끌겠습니다." 재일동포 대표 경제인 단체인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소속 도쿄한국상공회의소 12대 회장에 뉴커머 출신인 장영식 에이산 대표가 선출돼 지난 10일 취임했다. 90만 명에 이르는 재일동포 사회는 일본강점기에 건너온 이들과 그 후손을 중심으로 하는 올드커머와 1980년대 이후 진출한 뉴커머로 나뉘어 있다. 2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 뉴커머 출신 기업인이 올드커머가 주축인 상공회 회장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장 회장은 14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상공인회가 뉴커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단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서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임기 내에 신·구 정주자 간 화합과 상공회의 글로벌화에 앞장서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개인사업가와 법인 등 3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도쿄한국상공회의소는 재일동포 상공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회장은 재일한국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당연직으로 맡고 있다. 장 회장은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등 일본 내 17개 지역에서 면세점을 운영하며 연간 2억5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에이산을 이끌고 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이하 월드옥타) 부회장으로 뉴커머 출신 중에는 가장 성공한 기업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상공회가 뉴커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전임이었던 김광일 회장 때부터다. 장 회장은 월드옥타 동경지회, 재일한국인귀금속협회, 도쿄재일한국인연합회 등 뉴커머 대표 단체들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해 나간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는 "올드커머가 중심인 상공회는 현지화 및 일본 기업과의 네트워크가 강점이지만 해외 경제인과의 교류가 빈약했다"며 "월드옥타 등 해외 동포 단체와의 교류·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산하 단체였던 재일한국상공회의소는 일반 사단법인으로 독립하면서 둘로 나뉘었다가 지난 5월 27일 5년간의 분규를 끝내고 하나로 통합되면서 민단 산하로 복귀했다. 김광일 회장이 재일한국상의 신임 회장에 올랐고 그 후임을 장 회장이 맡게 됐다. 7년 전 상공회에 가입해 이사와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오른 장 회장은 "최근 한일 관계가 경색됐다고 하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며 "양국 사정을 잘 아는 재일동포 기업인이 뭉친 상공회가 앞장서서 친선관계 회복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 지난 10일 도쿄한국상공회의소 신임 회장에 선출된 장영식(사진 왼쪽) 회장이 김광일 전 회장에게서 도쿄한국상의 깃발을 전달받고 있다. wakaru@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6/14 16:52 송고
2016.06.16
두바이에 중동 첫 한류샵 여는 정숙천 씨
"한류팬들 한국문화 소비욕 커…'한류 사랑방'으로 만들 것"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K팝·드라마에서 시작한 한류가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오는 7월 말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시내의 아시아나호텔에 중동 최초의 한류샵 'K스타일숙'(숙은 아랍어로 시장이란 뜻)이 문을 연다. 주인은 2012년 중동에서 처음으로 K팝 아이돌 공연을 유치해 '중동 한류 전도사'로 불리게 된 '토털 리소스 인터내셔널(TRI)'의 정숙천(46) 대표. 그는 1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두바이에만 한류 팬클럽이 10여 개를 넘을 정도로 중동의 한류 확산이 눈부시다"며 "한국 문화와 상품에 대한 소비 욕구에 비해 구입처가 없다는 점에 착안해 한류샵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5성급인 아시아나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K스타일숙'에서는 전통 공예품과 의류, 미용품, 그림, 한류 캐릭터 상품 등 한국 제품만 전문적으로 취급할 예정이다. 매장에서 판매할 한국 상품 수입 계약을 위해 방한한 정 대표는 "중동 한류 팬들은 단순히 한류스타 사진이나 음반을 구매하려는 수준을 넘어서 전통문화와 대중문화를 골고루 향유하고 싶어한다"며 "한류샵은 단순히 제품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정보를 나누고 교류하는 소통의 장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중동의 한류에 대해 그는 "2008년 UAE에서 방영한 대장금은 시청률이 90%를 기록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방영된 허준과 주몽은 85%를 넘었다"며 "저유가로 인해 중동 경제가 위축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막대한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들에게 한류는 계속 퍼지는 추세"라고 소개했다. 이어 "한류 팬들은 10대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이 대부분인데 최근에는 남성팬도 늘고 있다"며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외출이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온라인 매장도 같이 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2012년 아이돌 그룹인 '제국의 아이들'을 초청해 두바이와 아부다비에서 공연한 것이 한류샵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공연장은 만석을 넘어 복도에도 팬들로 가득 찼고 입장을 못 한 수백 명의 팬들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쿠웨이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팬들도 많았어요. 이들은 김밥·비빔밥·떡볶이 등 한식 조리법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직접 만들어 먹을 정도로 한국 배우기에 열심이더군요. 뭔가 도움을 주어야겠다 싶어 그때부터 한류 팬클럽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위한 '사랑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팬클럽의 리더들과 정기적으로 간담회를 열면서 K팝 팬클럽 쇼케이스 공연을 도왔고 내친김에 한류샵까지 열게 됐다는 설명이다. 세계한인무역협회 두바이지회 회원이기도 한 그는 "두바이에 2호점까지 내고 다음으로는 주변국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라며 "최근 빗장이 열린 이란에도 점포를 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1996년 두바이에 진출해 UAE 항공에서 9년간 승무원으로 근무한 뒤 독립해 TRI를 차린 정 대표는 컨벤션·이벤트 매니지먼트·무역·여행업 등을 펼치고 있다. ▲ 토털 리소스 인터내셔널(TRI)'의 정숙천(46) 대표 wakaru@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6/13 16:25 송고
2016.06.15
“한국화훼산업 수출 활로 뚫겠다”
오르히디아 디자인그룹 김인숙 대표 지난 주 막을 내린 ‘2016 고양국제꽃박람회’ 화훼문화교류관에는 양란 ‘반다(vanda )'로 꾸며진 예술작품이 전시됐다. 작품을 직접 기획, 전시한 디자이너는 루마니아와 이집트 등을 배경으로 많은 사업을 펼쳐 온 오르히디아 디자인그룹(ORHIDEEA DESIGN, OHD) 김인숙 대표다. 10명의 디자이너 작품들 중 글로벌 테마는 김 대표 작품이 유일했다. “반다는 태국 등에서 자생하고 있는 양란인데 저는 여기에 돌과 고목 등을 접목시켰어요. 구조물을 이용하는 서양식과 달리 자연미를 살린 컨셉인데 관람객들이 예쁘게 봐 주시고 사진도 많이 찍어서 즐거운 경험이 됐어요.” 김인숙 대표는 고양 국제꽃박람회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외국에서 오랫동안 화훼 분야에서 일하고 연구해 온 화훼전문가이자 수준급 플로리스트이다. 20여년 전 루마니아에 진출한 후 전자제품산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다가 좋아하는 꽃으로 눈을 돌려 화훼사업을 시작했다. 인터콘티넨탈, 쉐라톤, 포시즌 등 이집트의 오성급호텔에 꽃을 전시하고 실내조경을 맡으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타고난 패션감각과 심미안 덕분이었지만 사업감각과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면 끝까지 연구하는 근성이 큰 몫을 했다. “모든 일을 내가 직접 겪고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든 다음에 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야만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해요. 호텔 일을 하면서도 한국에 올 때마다 양란 농가를 수없이 돌아다니며 재배기술을 배웠어요. 한국에는 기술이 좋아서 조직배양 기술, 절화 만드는 기술 등 배울 게 너무 많아요.” 기술도 좋고 품질도 좋은 한국의 화훼산업이 사양길을 걷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양란 등 화훼농가들이 대거 채소농가로 전환했어요. 우리 꽃을 세계 전역에 수출하면 큰 경쟁력이 있는데 못 하고 있으니 참 아쉽죠. 국제 표준 방식으로 포장을 해서 해외로 나가면 농가 수익도 크게 올릴 수 있고 일석이조예요.” 김 대표는 아프리카건 유럽이건 한국에 꽃을 수출하는 국가에다 우리 꽃을 수출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자신감은 오랜 시간 이어 온 사업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 시장을 무대로 바이어로 활약했고, 루마니아에 한국의 고구마를 수출한 경험도 있다. 현재 루마니아에서는 한국 고구마 종자로 농사를 지어서 벨기에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내 보내고 있는데 그 유통의 물꼬를 김 대표가 튼 것이다. “루마니아에서 오래 전에 고구마 농사를 했는데 그게 실패를 해서 수입해서 먹고 있었어요. 그래서 4년 여 전 루마니아에 한국 고구마 종자를 팔 생각을 하고 루마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을 만났죠. 일이 잘 진행되어 경북대 조은기 박사와 농촌진흥청 실용화재단 전운성 이사장 등과 함께 우리 회사 사무실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어요. 그게 2011년 10월입니다. 이후 로얄티를 받고 고구마가 유럽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후에 경북대 학생들의 유럽 교류 등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게 됐지요.” ▲ 2011년 10월 21일 OHD 루마니아 사옥에서 있은 고구마 종자 협약식 사진. 왼쪽부터 경북대 조은기 박사, 전운 성 농진청실용화재단 이사장, 농업아카데미 회장, 김인숙 대표, 고구마 시험재재를 한 이병찬 사장 ▲ 루마니아 농업아카데미와 한국 고구마 종자 수출 계약을 한 계약서 김 대표는 그 동안 루마니아와 이집트 카이로를 근거지로 해서 한국의 화훼를 유럽과 아랍 지역에 유통시켜왔는데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그런 취지에서 최근 서울에 오르히디아 디자인그룹 한국법인을 설립했다. “한국의 아름답고 우수한 꽃들을 네덜란드 경매시장으로 많이 진출시키는 게 꿈이에요. 얼마나 성공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해 매진할 계획입니다.” 유럽에서 사업을 하면서 글로벌 여성경제인연합회, 세계 한민족여성재단 등 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 대표는 한국의 화훼산업 분야 발전을 위해서 진정한 글로벌화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한국 화훼산업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글로벌화되려면 화훼산업의 컨셉과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말 그래로 인터내셔널하게 동서양 교류를 활발히 해야 하고, 전체 디자인에서부터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해야 합니다. 외국의 화훼관련 박람회나 전시회도 많이 가 보고 또 외국의 전문가, 바이어들도 많이 초청해서 교류하는 것이 중요해요.” 글로벌한 감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많은 차세대 인재들이 있는데 이들을 육성, 발전시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영국, 벨기에 등 화훼 선진국에서 공부하고 온 화훼전문가들이 한국에서 꽃집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이 젊고 참신한 인력들을 잘 활용하면 한국 화훼산업이 한 차원 발전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보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서 사업을 해 성공하면 반드시 그 나라에 베풀어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신조다. 외국에서 사업할 때 사회환원을 실천했듯이 한국에서 돈을 벌면 한국에 그만큼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꽃을 수출해 화훼농가를 살리고, 수출로 얻은 수입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차세대를 육성해 화훼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김 대표의 바램이 이루어져 한국의 화훼산업이 아름답게 도약기를 맞을 날을 기대해 본다.
2016.06.03
인니 칼리만탄에 호텔 짓는 한상 나성문 씨
2010년 진출해 4개 자회사 둔 타타프리미어그룹 일궈 국내외 특허받은 골프공 '엑스페론' 해외 총판도 맡아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1976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1994년 광주예술전문대 사진학과에 입학했다가 그해 의무경찰에 자원입대했고, 제대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사회에 진출했다. 여기까지 나성문(41) 씨의 이력은 다른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중·고교 때 태권도 선수 생활을 했다는 점이 눈에 띌 뿐이다. 그러나 1997년 의무경찰 복무 후 그의 20여 년의 삶은 남들과 좀 특별하다. 그가 인도네시아로 출발하기에 앞서 2일 서울 시내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가 건넨 명함 앞면에는 사진과 함께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자카르타지회 이사', 뒷면에는 '에이스골프(Ace Golf) 국제 마케팅 디렉터'라고 표기돼 있다. 서울과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하는 휴대전화 번호와 팩시밀리 번호, 이메일 주소 등도 빼곡히 적혀 있다. "지난달 22∼25일 울산에서 열린 제18차 월드옥타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에 참가하고, 에이스골프 본사가 있는 광주에 들렀다가 6주 만에 인도네시아로 돌아갑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요즘은 땅 위에 있는 시간보다 비행기 타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바쁩니다." 나 대표는 인도네시아에서 타타프리미어그룹(TATA PREMIER GROUP)의 대표를 맡고 있다. 중국계 아내인 칭타 스탠리가 회장이다. 그룹 산하에는 4개의 자회사가 있다. 유류·윤활유, 타이어·배터리, KCC 페인트, 중장비 부품, 마린 서비스, 무역 등을 하는 'TATA NIAGAMAS', 광물을 중개하고 광산 기자재 및 소모품을 취급하는 'TATA GLOBAL ENERGI', 건설업체 'TATA MULTI CIPTA KARYA', 호텔을 운영하는 'TATA GLOBAL INDONESIA' 등이다. 이 타타그룹을 실제 경영하는 그는 인도네시아 사업을 챙기면서도 최근 에이스골프의 해외 총괄 판매를 맡아 인도네시아-서울-광주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유럽 등지를 하루가 멀다고 날아다닌다. "제 고향의 기업에서 개발한 골프공 '엑스페론'(Xperon)에 매료돼 해외 판매를 맡게 됐어요. 제가 이 골프공에 날개를 달아준다면 전 세계를 석권할 수 있을 것 같아 뛰어든 것이죠. 골프공 제작 과정에서 중력 때문에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는 원리를 밝혀낸 뒤 균형을 잡아주는 '듀얼 밸런스' 제조공법을 창안, 수많은 국내외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보기 플레이어는 파 플레이어로, 파 플레이어는 버디 플레이어로 만들 수 있는 신비의 공입니다." 나 대표는 휴대전화를 열어 비디오를 보여주며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경사가 없는 곳에서 퍼팅하는데도 공이 한쪽으로 계속 휘어나가는 영상을 보여줬다. "95%의 골퍼는 골프공이 완전한 구형체가 아니라는 것을 몰라요. 무게중심이 골프공마다 다르죠. 그런데 엑스페론만큼은 정확한 무게중심을 찾아 생산하고 그곳에 '에임라인'(조준선)을 새겨넣고 있습니다. 이 선 방향대로 치면 공이 똑바로 나갑니다." 직접 꺼내 보여준 골프공은 시중에 유통되는 것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올해 초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골프산업용품박람회인 '2016 PGA 상품 쇼'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정신없이 엑스페론의 특장점을 자랑하는 나 대표의 얼굴에는 뭔가 남과 다른 열정이 배어 나왔다. 말을 끊고 "연간 얼마나 매출을 올리느냐"고 묻자 "이제 시작"이라며 "지금까지 번 돈은 새로운 사업을 위해 개발하고 투자하는 준비 자금일 뿐이라고 에둘러 대답했다. 대신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말하며 웃었다. 나 대표의 그런 여유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의 삶은 지난 2010년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아내를 만나 결혼해 그해 12월 그곳에 이민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나 대표의 부모는 그가 의무경찰에서 제대하자 미국에 유학을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거절했고, 아예 대학 복학도 포기했다. 그러고는 의경 복무할 때 믿고 따르던 형사들의 권유로 인천에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몇 달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업 자금을 만들었어요. 곧바로 서울 명동에 진출했죠. 처음에는 시계·지갑·다이어리·가방 등을 유통하는 잡화 장사를 했습니다. 인천, 충남 온양·천안, 부산, 마산 등 7개 체인을 둘 정도로 괜찮았죠. 그런데 1997년 불어닥친 IMF 한파로 쫄딱 망했습니다." 3년여 동안 부도의 후유증을 앓던 그는 경찰공무원이 되겠다고 시험 준비를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사상 최대의 경쟁률을 뚫지 못하고 쓴맛을 봐야만 했다. 이 길이 아니라고 자위하며 다시 요식업에 뛰어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이 또한 실패. 서비스업, 외판업 등으로 계속 바꿔가면서 발버둥을 쳤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권유로 '케이.지 건설'에 입사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기획실장을 맡아 건설업 전반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내친김에 2002년 인하공업전문대 건축학과 야간반에 들어갔다. 하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주경야독의 꿈도 모 회사의 부도로 산산이 깨졌다.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난 그는 2003년 미래해운에 사무장으로 입사했다. 이곳에서는 선박관리 안전 매뉴얼을 공부했고, 선박 안전관리자 교육도 이수했다. "1년 만에 미래해운을 그만두고 나와 개그맨 양원경 씨의 매니저로 일했어요. 또 공연기획사에서도 근무했고, 여행사에도 잠시 발을 들여놓았어요. 정말이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젊은 날에 산전수전 다 겪었어요." 그는 이렇게 쌓은 인맥과 경험을 인도네시아에서 고스란히 살려내고 있다. 현재 칼리만탄티무르 주에 있는 도시 발릭파판에 '맥스 원 호텔'을 짓고 있다. 112개 객실을 갖춘 7층짜리 3성급 비즈니스호텔로 2017년 문을 열 예정이다. 이 지역은 보르네오 섬 최대 석유 기지의 하나이기에 관련 업계의 비즈니스맨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다. 나성문 인도네시아 타타프리미어그룹 대표. ghwang@yna.co.kr
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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